논단

폭력의 악순환과 그 악순환을 끊는 길 - 폭력에 대한 신학적 단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5-07 23:18
조회
3499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한국사목연구소 월간 「사목」 2006년 6월호 특집원고입니다(20060507).



폭력의 악순환과 그 악순환을 끊는 길 - 폭력에 대한 신학적 단상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기획위원)



1. 폭력의 악순환


우리는 폭력을 말할 때 하나의 방법으로서 폭력 또는 현상으로서 폭력만을 문제시한다. 그러나 폭력은 여러 가지 수준에서 정의할 수 있다. 거시적인 사회구조 내지는 사회현상으로 폭력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먼저 가장 근원적인 폭력으로서 ‘구조화된 폭력’이다. 구조화된 폭력은 음으로 양으로 사람들의 동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흔히 ‘폭력’이라는 사실이 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강제적인 힘의 지배라는 점에서 명백히 폭력이다. 국가가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힘, 우월한 계급이나 계층이 약한 계급이나 계층을 지배하는 힘,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힘, 이 모든 것이 구조적 폭력이다.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모든 폭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그 구조적 폭력에 대항하는 ‘대항폭력’이 있다. 대항폭력은 우월한 힘의 지배를 받는 약한 사람들의 대응방식이다. 구조적 폭력의 지배 양상을 뒤집어엎으려는 모든 폭력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것은 대중적인 봉기나 혁명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테러’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흔히 논란을 벌일 때 늘 문제되는 폭력이 바로 이 ‘대항폭력’이다. 대항폭력의 한 형태로서 봉기나 혁명은 성공할 경우 곧바로 정당성을 얻고, 혹 실패했더라도 후대의 역사에서 재평가되어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한다. 민족독립 전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테러’로 불리는 폭력은 경우에 따라서는 그 정당성이 옹호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소수의 사람들 이외에서는 좀처럼 그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그 대항폭력을 응징하는 ‘진압폭력’이 있다. 대항폭력을 문제시하는 만큼 진압폭력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정당성을 인정받기도 한다. 국가 내에서의 분규나 봉기를 진압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동의, 그 정당성의 인정은 구조적 폭력을 문제시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구조화된 폭력을 문제시할 것 같으면 진압폭력은 설 자리가 없다. 폭력적 구조를 그대로 두고 이루어지는 진압의 폭력은 더욱 가중된 폭력 지배 현상이다.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현실에서 이와 같은 폭력은 악순환하고 있다. 진압으로 폭력사태가 단절된다면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겠으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더 강도 높은 폭력사태의 만연되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이처럼 답답하고 두려운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이 없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어떤 지혜를 찾을 수는 없을까?



2. 예수 그리스도의 길, 비폭력의 길이었을까?


흔히 예수의 길은 ‘비폭력’의 길로 인식되고 있다. 그와 같은 인식은 폭력의 악순환 구조에서 ‘폭력’에 대하여 ‘비폭력’을 지향하는 것이 많은 종교적 가르침의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폭력’을 거부한다면 그에 대항하는 근본 동기나 행동 방식에서 철저하게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은 매우 간단명료하다. ‘폭력’ 대 ‘비폭력’이라는 아주 일반화된 도식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 도식에 따라 위대한 인물이나 어떤 세력이 평가된다. 그리고 두말할 나위 없이 비폭력은 도덕적 우위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고, 위대한 인물들은 그 비폭력의 주창자이거나 그것을 실천한 것으로 평가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와 같이 자명한 도식에서 평가된다. 현대사에서는 간디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폭력’ 대 ‘비폭력’이라는 이항대립의 인식에서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사실상 모든 폭력의 근원으로서 구조적 폭력에 대한 방관이다. 그 구조적 폭력을 간과하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폭력만을 문제시함으로써 구조적 폭력을 저지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결국은 본의 아니게 폭력 자체를 방관하는 사태에 빠질 수 있다. 이런 경우 ‘비폭력’은 더 큰 폭력을 용인함으로써 폭력의 지배를 옹호하는 데 기여한다. 그 비폭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내면세계의 자유, 정신세계의 평화 가운데서 그 비폭력의 진가를 누리고 싶어 하지만, 폭력의 현장에 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방관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비폭력’은 폭력에 대항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가장 높은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더 위험한 폭력의 사태에 빠지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에 위험하다. 폭력에 직접 저항하는 ‘대항폭력’이 자기파괴적인 효과를 지니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면, ‘비폭력’은 정신세계로 도피해 현실의 폭력을 외면해 버릴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의 길이 과연 ‘비폭력’의 길이었을까? 한편으로는 매우 자명한 듯이 인식하고 있으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종종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예컨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선언(마태 10,34 이하)은 비폭력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당혹스럽다. 과연 그 진의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폭력’ 대 ‘비폭력’의 이항대립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생애 전반을 살펴볼 수도 있지만, 특별히 성전정화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결정적으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오늘 현실에서 이 사건을 새삼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斷) 근본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3.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길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정화 사건은 구조적 폭력의 지배를 정면으로 문제시한 사건이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물리친 것은, 요즘 건물이나 사무실 문에 붙어 있는 ‘잡상인 출입금지’ 정도의 의미와 효과를 노린 행동이 아니다. 성전에서의 상행위 금지는 성전을 매개로 하는 유대의 지배체제, 나아가 그 지배체제를 매개로 하는 로마의 지배체제에 대한 공격행위이다.

유대의 지배자들은 민중들에게 성전제의를 필수적인 의무로 부과하였고, 성전제의에 참여하는 것은 곧 제물을 헌납하는 것을 의미했다. 국가체제와 별개일 수 없었던 성전의 제물은 곧 유대 민중들에게 조세를 의미했다. 통상적인 조세라면 자기가 생산한 것 가운데 일부를 바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성전의 제물은 ‘거룩하고 흠없는’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성전으로부터 머나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제물을 준비해 올 것 같으면, 이미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렀을 때에는 흠이 생기기 마련이다. 성전에 제물로 드릴 가축을 파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사연이 여기에 있다. 흠없고 팔팔한 제물을 웃돈 받고 팔았던 것이다. 환전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일반 유대민중들이 일상에서 통용하던 화폐는 로마의 황제가 그려진 화폐다. 그런데 성전에서 하느님께 드릴 제물에 로마 황제의 얼굴이 그려진 제물을 드릴 수 없다고 하여 성전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바꿔줬다. 물론 여기에서도 ‘환율’ 이상의 웃돈을 받은 건 당연했다. 그러므로 제물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을 몰아낸 것은, 지배체제의 민중에 대한 구체적 수탈구조를 부정한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폭력적인 지배구조의 부정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평소에도 ‘성전을 허물겠다’고 선언하고 다녔고, 그 말대로 성전을 허문 것이다. ‘테러’를 통해 성전을 폭파한 게 아니라, 그 성전이 상징하는 지배구조 체제를 허물고자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은 근원적 폭력 곧 구조적 폭력을 정면 거부한 것이다.

그러면 그 폭력에 대항하는 방식은 ‘비폭력’적이었을까? 그것은 ‘비폭력’도 아니오 ‘테러’와 같은 ‘대항폭력’도 아니었다. 명백히 상인들을 강제적으로 몰아냈다는 의미에서 비폭력이 아니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채찍까지 들었다고 했다. 그들을 강제적으로 몰아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장사 수단까지도 뒤집어엎어 버리는 확실한 ‘난동’이었다. 그것은 수단상 철저하게 비폭력적 방식을 취한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 방식이 파괴적인 폭력을 동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테러’ 또는 무장봉기와 같은 ‘대항폭력’과도 달랐다. 구조적인 폭력에 저항하되, 비폭력의 수동성이 초래할 수도 있는 방관의 위험성을 뛰어넘는 방식인 동시에 대항폭력이 지니는 파괴적 위험성을 뛰어넘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폭력’과 ‘비폭력’의 위험성을 동시에 넘어선 ‘반폭력’(anti violence)이었다.

그 ‘반폭력’의 행동은 어찌 보면 매우 모호해 보인다. 도대체 그러한 행동으로 무슨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행동의 효과는 십자가 사건이 입증한다. 그 일로 말미암아 예수는 폭력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지배의 폭력, 구조화된 폭력은 예수를 묵과할 수 없는 존재로 판단한다. 군사적 무장봉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과 행동이 자신들의 폭력적 지배를 거부하고 그 밑바탕을 뒤흔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성전정화 사건은 사실상 상징적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돌발적 행동이 아닌,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행동이었다. 그 행동이 노린 효과는 당시의 상식적인 질서, 지배구조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예수와 그 일행은 상징적 효과의 의의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예루살렘 입성시 나귀를 타고 나선 것부터 그렇다. 나귀를 탄 예수의 모습은 폭력적 지배를 당연시하는 권위있는 군주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일종의 의도된 연출이었다. 그 행렬에 이어 성전을 파괴하는 상징적 행동의 효과, 그것은 지배의 폭력에 신음하던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것이었다. 그 체제를 운명의 족쇄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언제든지 그렇게 내팽개쳐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이었다. 폭력의 구조를 만천하에 드러냄으로써, 그 운명의 족쇄에 묶여 있던 사람들이 자유로운 주체로 나설 수 있게 한 것이다. 유대와 로마의 지배자들이 부랴부랴 예수를 체포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여기에 있다.

지배자들은 오산했다. 그 주모자를 죽이면 그 저항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십자가의 처형 사건은 오히려 그들의 폭력을 더 확실하게 입증해줄 뿐이었다. 십자가의 사건은 폭력의 추악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주었다. 그 폭력은 죄를 범한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마저 죄인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광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 부활의 사건은 바로 그 십자가의 사건 현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부활을 믿는다. 폭력의 절정에서 폭력이 끝장나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폭력을 밀쳐낸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재발견인 동시에 그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 자신의 새로운 삶에 대한 자각이었다. 부활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4. 폭력과 비폭력을 넘어선 반폭력


애초부터 위험한 폭력이 자리하고 있는 현실에서는 그 어떠한 선택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대항폭력이 자기파괴와 타인의 희생이라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면, 역시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서 비폭력 또한 더 큰 폭력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근원적인 폭력을 문제시하는 반폭력은 그 양자의 위험성을 동시에 뛰어넘으려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 그것마저도 구조화된 폭력의 현실에서는 위험에 처한다. 반폭력의 행동마저도 구조화된 폭력 세력은 불온시하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안전한 길은 없다.

그러나 예수가 보여 준 반폭력의 행동은, 적어도 자기파괴적이거나 필연적인 희생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울러 내면세계로의 도피로 더 큰 폭력을 방관하지도 않는다. 생명과 인간의 존엄함을 내세우며 폭력을 근절하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최선의 선택일 수밖에 없다.

폭력의 악순환, 그것은 끊임없이 위험한 선택만을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는 폭력의 악순환을 끝낼 수 있는 성찰의 이성, 화해의 실현에 대한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관습이나 문화적 차이를 넘어 한 형제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그 희망을 저버린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믿음은 아무 쓸모없다. 모든 폭력이 끝장나는 세계에 대한 희망, 그 희망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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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