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남북 평화공존과 통일을 위한 종교의 역할 - 기독교의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5-24 00:53
조회
3328
5.18항쟁 26주년기념 학술대회: “민주주의, 평화, 통일과 시민사회”

2006.5.23(화)-5.24(수) / 전남대학교 국제회의동 제1세미나실

세션 3 “통일운동과 시민사회 II” 5월 23일(화) 오후 오후 3:45 - 6:00



남북 평화공존과 통일을 위한 종교의 역할

- 기독교의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최형묵(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신학연구 위원회)



1. 남북분단과 반공주의적 기독교


한국 기독교가 유난히 반공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는 세계 다른 지역의 기독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근현대의 정치적 혁명, 특히 현대 사회주의혁명 과정에서 기독교가 반공주의적 입장을 취한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의 경우 그 이념적 스펙트럼이 결코 획일화되어 있지는 않다. 서구 기독교에는 기독교 사회주의와 같은 경향이 뚜렷하게 존재하는가 하면, 과거 동구 사회주의체제 안에서도 기독교는 그 나름대로 존립해 왔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그야말로 이념과잉이라 할 만큼 과도하게 반공 일변도의 색채를 띠어 왔다.

한국 기독교가 그와 같이 이념과잉의 반공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띤 데에는 그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우선은 한국에 전파된 기독교가 주로 미국의 근본주의적 기독교분파였다는 데 있다.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사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뤄졌다. 기독교 선교역사에서 이례적으로 한국인 스스로 기독교를 수용하는 시도가 있었는가 하면 미국 이외에도 캐나다, 호주,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의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 선교가 이뤄졌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한국 기독교는 그 선교적 배경과 관련하여 다양한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의 주류는 근본주의적인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하에서 형성되었다. 이미 구한말에 ‘양대인(洋大人)의식’이라 불리는 변형된 사대의식이 형성될 정도로 선교사에 대한 의존성이 강했던 한국 기독교는 교회를 통한 민족운동을 억제하려는 선교사들의 강력한 영향하에 있었다.

해방과 남북분단, 그리고 이어진 미군정은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적 성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기독교는 종교 비율상 소수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적으로 계몽된’ 기독교 인사들은 미군정의 중요한 협조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군정에 적극 협력한 한국 기독교는 그 영향력을 확대할 중요한 계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새로 형성된 냉전체제의 최일선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스스로의 이해관계로 인식하는 체질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여기에 한국전쟁으로 인한 북쪽 기독교인들의 대거 남하는 친미 반공주의적 한국 기독교의 체질 강화에 결정타 역할을 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친미 반공주의 노선은 그야말로 생존의 논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노골적인 기독교 우대 정책으로 한국 기독교의 친미 반공주의 노선은 요지부동하게 되었다. 일제치하와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적 노선을 택했던 소수의 기독교 인사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같은 맥은 한국전쟁으로 사실상 단절되고 한국 기독교는 친미 반공주의의 단일 색조를 띠게 되었다.

자유당 정권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친미 반공주의의 포로 상태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자유당 정권이 붕괴했을 때조차도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에 대한 맹목성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 친미 반공주정권과 밀착되어 있던 기독교 스스로의 반성은 그야말로 미동에 불과했다.  그 반성이 철저하지 못했기에 한국 기독교는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이른바 근본주의적 성향의 보수 기독교계는 말할 것 없거니와 훗날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 선 개혁적인 기독교 역시 반공주의의 연장선상에서 5.16의 정당성을 인정했을 정도다. 예컨대 5.16 직후 한국기독교연합회(오늘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민정이양을 촉구하는 데 강조점을 두기는 했지만 일정 부분 ‘혁명’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금반 5.16군사혁명은 조국을 공산 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과 부패로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였다”고 밝히고 있다.  민주적 절차와 법질서의 유린도 반공을 위해서라면 유보될 수 있다는 것이 당시까지 한국 기독교의 인식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는 그만큼 강고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는 남북분단의 결과로 더욱 강화된 측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것은 남북분단을 촉진시키고 강화시켜 온 측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남북분단은 단순히 국토의 분단이 아니라 정치경제체제의 분단을 포함 사회문화 전반의 분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반공주의가 분단을 촉진시키고 강화하여 온 점은 결코 소홀히 평가될 수 없다. 남쪽의 반공주의 체제를 거의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북쪽의 체제를 타자화하고 증오시했다는 점에서 한국 기독교는 확실히 분단 체제를 촉진시키고 강화해 왔다.

좀처럼 무너져 내리기 어려울 것 같았던 한국 기독교의 반공주의는 정권과의 틈새가 벌어지면서 점차 균열되기 시작한다. 1964년 한일협정 체결과 1969년 삼선개헌 등을 계기로 한국 교회 일각에서는 정권과 거리를 두는 경향이 뚜렷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그 과정과 함께 급속도로 진전된 경제개발로 소외된 민중의 문제가 제기되자 한국 기독교는 그에 대해 선교적 차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본격화된 기독교의 민주화운동과 민중선교에 대해 용공으로 몰아부친 정권의 공세 앞에 오히려 기독교는 서서히 반공주의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 시작했다. 반공은 그 자체로 수호해야 할 가치를 지닌 이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했고, 민중 소외의 현실에서 보편적인 민주적 권리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 한국 기독교가 민주적인 제 권리를 억압하고 민중을 소외시키는 체제를 뛰어넘어 통일의 과제를 인식한 것도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였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대세는 여전히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거기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기독교의 흐름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한국 기독교의 입장에서 그것은,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단절된 기독교 민족ㆍ민중운동의 회복을 의미했다.

    


2.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


한국 기독교가 민주화 운동을 펼치고 민중의 문제에 접근하면서 반공주의로부터 헤어 나올 계기를 얻게 된 것은 분명하지만 실제로 냉전의식을 떨쳐버리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한동안 억압되어 왔던 통일논의가 4.19 직후에 그 숨통을 트일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기독교계는 통일논의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는 통일논의 자체를 위험시하고 경계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을 때에도 기독교계는 “사상과 이념과 제도를 초월하는 민족적 대단결”을 의심스러워하며 이를 경계하는 성명서들을 발표하였다.  1970년대 기독교계의 통일논의에 대한 관심은 일부 선각자들의 몫이었을 뿐  아직 기독교 전반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한국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통일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 활동을 펼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이다.  그 실질적인 계기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었다. 새삼 말할 것 없이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사회에 여러 변화를 불러일으킨 중대한 계기였다. 그것은 정치 제도권 내의 민주화세력의 무력함을 입증하였다는 점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 근본적 변혁운동의 인식을 낳은 계기였고, 동시에 선언적 주체로만 머물러 있던 민중이 실질적 주체로 부상한 계기였다. 통일운동과 관련해서는 독재정권을 지원한 미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미국이 냉전체제의 고수를 위해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민주화와 민족자주화, 그리고 통일의 과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인식은 친미 반공주의의 온상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던 기독교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고, 이로써 한국 기독교는 친미 반공주의에서 벗어나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계기를 얻게 되었다.

기독교가 통일운동에 적극 뛰어들게 되자 기독교 스스로가 지닌 중요한 자산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우선 기독교 ‘복음’의 보편성은 정권의 이념공세를 막아줄 중요한 방어막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의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 그리고 민중운동에 대해 독재정권은 끊임없이 용공 딱지를 붙이며 공격했지만, 그렇게 공격을 받을수록 기독교는 억압받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성서의 관심을 더욱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또한 타자를 증오시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 행위인지를 인식하며 북쪽에 대한 적대감을 극복해나갔다. 다음으로 기독교의 광범위한 세계적 네크워크가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을 지원했다. 진보적 기독교의 전세계적 네트워크는 독재정권의 공격을 받는 한국 기독교의 실질적인 방어막 역할을 했고, 통일운동 그 자체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81년 한국 기독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공교회를 통한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 그해 6월 서울에서 열린 한ㆍ독 교회협의회에서는 공동결의문을 통해 분단된 국가의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임을 밝혔다. “양국의 분단은 서로 상이한 역사적 배경과 서로 상이한 세력에 의해 생기게 되었으나 양국 교회는 자유ㆍ정의ㆍ평화 가운데서 통일을 성취하려는 민족의 포부를 기독교적 사명과 책임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히며, 아울러 “우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통일문제를 연구하고 촉진하는 위원회나 연구소를 설치할 것을 권장하며, 독일교회가 재독한인들의 평화통일에 관한 논의를 지원하도록 요청한다”고 하였다. 이 권유를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82년 2월 28일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여 같은 해 9월 16일 운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운영위원의 활동은 번번이 당시 신군부정권의 방해로 원활히 진행될 수 없었다. 공교회 차원에서 시작된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은 한 동안 국내에서는 성과를 거두기 어려웠고 결국 국제적인 협력이 중요한 통일운동 방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1984년 10월 28-11월 2일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위원회가 일본 도잔소(東山壯)에서 연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 협의회”는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한국 교회 대표들과 해외 여러 나라 교회 대표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최초의 모임이었던 이 협의회는 그 보고서를 통해 이후 한국 기독교 통일운동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전세계의 긴장완화를 위해 한반도의 평화가 결정적으로 주요하다고 인식한 도잔소 협의회 정신을 따라 한국 기독교와 세계 여러 나라의 기독교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실질적인 활동을 다각도로 펼쳤다. 미국, 캐나다, 일본 유럽의 교회들과 세계교회협의회 등 에큐메니칼 기구 대표들이 북한을 방문한 후 많은 정보를 한국 기독교에 전해주었고, 북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기도 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적 협력과 병진하여 국내에서의 활동 또한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1985년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국내에서도 통일 협의회를 열 수 있게 되었고, 이후 연례적으로 협의회를 한 결과 1988년 2월 29일에는「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의 선언」이라는 역사적 문서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언은 1980년대 기독교 통일운동의 성과를 집약한 기념비적 업적이 되었다. 이 선언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천명한 자주, 평화, 사상ㆍ이념ㆍ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의 정신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기본원칙이 되어야 함을 재삼 확인하면서, 여기에 인도주의적 원칙과 민주적 참여의 원칙을 덧붙여 5원칙을 천명하였다. 이 다섯 가지 원칙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제안과 교회의 과제 등을 제시하고 있는 이 선언은 기독교 통일운동에서의 의의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의 통일운동의 전선을 확장해주는 의의를 지니기도 했다. 정부 당국의 통일논의 이외에는 불온시 되던 상황에서 기독교의 장점이 최대한 발휘되는 성과를 냈던 것이다. 그 선언의 내용은 정부당국의 통일정책에도 영향을 끼쳐 1991년 12월 13일 남북한 당국 사이에 체결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ㆍ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한국기독교회협의회의 1988년 선언을 정점으로 하여 기독교 통일운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그 선언 전해인 1987년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의 기독교 대표자들이 직접 만난 데 이어 1988년 선언 이후에 제2차 한반도평화통일을 위한 협의회를 갖고 남북의 교회 대표자들이 만났다. 이 협의회에서 남북의 교회 대표자들은 1988년 선언을 지지하고 1995년을 통일의 희년으로 선포하였다. 이후 기독교의 통일운동은 1988년 선언의 취지를 널리 확산시키는 한편 세 차례에 걸친 글리온 회의를 비롯 남북 교회 대표자들의 직접적 만남과 교류 형태로 지속되었다.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남한당국이 일시적으로 경색되기도 했지만 기독교 통일운동의 기조는 계속되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개인적 결행이기는 했지만, 북쪽 당국에 남쪽 기독교에 대한 신뢰감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직접적 만남을 시도하는 남북 기독교인들 사이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서 진행된 1990년 제3차 글리온 회의에서는 남북 기독교 대표자들 사이에서 남북당국간 상호불가침 선언과 단계적 군비축소 실현 및 팀스피리트 등 대규모 군사훈련 즉각 중지 촉구, 당국의 남북교류 창구단일화 반대, 민간접촉에 장애가 되는 법률ㆍ제도 폐지 등의 입장을 천명하는 한편 교회 내적으로 평화통일 기도주일의 제정과 공동기도문의 작성 등을 합의하였다. 그 결과 1990년대 전반기 기독교 통일운동은 한편으로는 남북 기독교 대표자들의 직접적 만남을 통한 교류형태로, 또 한편으로는 교회 내에서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며 보다 광범위한 대중적 운동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이전까지의 교회 지도자들의 선언적 운동 형태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1988년 선언 이후 한국 기독교의 통일운동은 그 진일보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역동성 면에서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것은 기독교 내적인 변화보다도 한국 사회의 변화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적어도 1988년 선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 내지는 한국 사회변혁운동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만큼 통일운동은 매우 긴장감 있고 역동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른바 1987년 체제 성립 이후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은 일정하게 괴리되는 양상이 전개되었고, 민주화운동의 동력을 상실한 통일운동은 그 긴장감이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통일에 관한 논의와 절차상의 주도권이 정부당국에 넘어가는 양상이 전개되어 민간운동으로서 통일운동은 약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그리고 북한의 식량난 등은 통일운동의 조건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민간의 다른 통일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겠지만, 1990년 중반 이후 기독교 통일운동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3. 통일운동의 주도권 변화와 기독교의 대응


민간의 통일운동의 동력이 떨어질 즈음 남한정부 당국은 통일운동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이전시키려는 시도를 하지만, 1990년대 초반 남북관계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한동안 복잡하고 혼미한 상태를 거듭한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후의 경색국면, 그리고 북한의 경제위기와 식량난 등은 남북관계에 미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북쪽은 위축되는 분위기였고 남쪽은 거꾸로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대화와 협상의 절차는 원만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북한의 붕괴를 유도하고 흡수통일을 기대하던 분위기가 팽배했고, 그것이 김영삼 정권의 대북 강경노선의 배경이었다. 그러나 김정일 체제의 안착과 핵문제를 둘러싼 북ㆍ미간 제네바 협정 체결과정을 통해 북한 체제가 쉽사리 붕괴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부터 대북 강경책은 설득력을 잃게 된다. 여기에 1997년 IMF 구제금융 위기를 겪고 난 후 경제적 활로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던 남한 사회의 요구와,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을 경유한 북한 사회의 상대적 자신감 등이 결합하면서 적어도 남북 당국 사이에서의 유화국면은 분명한 추세로 자리를 잡게 된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과 6.15 공동선언은 그 결정적 기점이 되었고, 이후 통일운동의 주도권은 사실상 완전히 정부당국으로 이전되었다.

통일에 관한 협상과 절차의 주도권이 정부당국에 넘어가면서 사회 여러 분야의 남북교류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통일운동 자체가 불온시되던 상황에서는 그 운동이 소수에 의해 이뤄질 수밖에 없었지만, 위험부담이 사라진 상황에서 여러 분야의 교류가 활성화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제 ‘통일운동’이라는 말로는 그 현상을 설명하기에 부적합하리만치 다양한 남북교류 형태가 등장하게 되었다. 기독교 안에서도 이전까지의 통일운동 접근방식은 하나의 형태로 상대화되었고 또 다른 접근방식이 등장하게 되었다. 북한의 경제위기와 식량난으로 인도주의적 접근방식은, 남한 사회 수구세력의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류에서 기본이 되는 접근방식이 되었다. 최근 기독교의 남북교류에서 그 인도주의적 접근방식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매우 두드러진 하나의 양상이다. 하지만 기독교 안에는 평화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접근방식과 북한선교 차원에서 북한교회 재건에 중점을 두는 접근방식으로 명확하게 구별되는 경향이 형성되었다.

평화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접근방식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통일운동을 말한다. 진보적인 개신교 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그 가맹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은 북쪽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공식적인 협력 상대로 하여 꾸준히 남북한 사이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 입장은 교회의 확장보다 남북한 사이의 평화공존과 민족의 통일이 우선되는 과제라 보며 교회는 이를 위해 헌신하여야 한다는 태도이다. 반면에 북한선교를 강조하는 입장은 보수적인 개신교 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그 가맹교단들을 중심으로 하는 태도로서, 다른 어떤 과제보다 앞서 북한교회의 재건을 강조한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대다수 보수적인 교단들은 북한 체제 자체는 말할 것 없거니와 조선그리스도교연맹마저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탈북자들을 통한 북한의 ‘지하교회’에 대한 접근을 모색하고, 당면한 교류보다는 통일 이후 북한교회 재건을 최고의 과제로 꼽고 있다. 평화공존과 통일을 지향하는 기독교의 입장이 비교적 선명한 데 반해 북한선교론의 입장은 사실 그 자체 안에서도 혼선된 입장들이 뒤섞여 있다. 예컨대 공식적으로 북쪽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편의상 교류를 하는 실용주의적 태도가 있는가 하면 오로지 북한의 ‘지하교회’에 대한 접근과 북한교회의 재건에만 몰두하는 태도도 있다.

이와 같은 접근방식의 차이를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선교론 자체에 대한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간 통일운동에 참여해 온 기독교가 일관되게 견지해온 신학적 입장은 ‘하느님의 선교’론이다.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론은 선교의 주체를 교회로 보지 않고 하느님으로 보아 의로운 모든 활동을 하느님 자신이 펼치는 선교로 이해한다. 정의와 평화, 민족의 통일은 그런 맥락에서 신학적으로 정당화된다. 반면 북한선교 내지는 북한교회 재건을 강조하는 입장은 기독교 및 교회 중심적인 기존의 선교론을 그대로 따르며 기독교의 확장을 곧 선교로 이해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평화적 공존과 민족의 통일은 부차화되고 교회의 존립과 그 확장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된다.

이러한 접근방식의 차이는 비단 신학적 입장 차이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그 현실적인 입지조건의 차이와도 결부되어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다시피 남한의 기독교는 사실상 모두 반공주의를 거의 생래적인 체질로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의 기독교는 민주화운동과 민중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반공주의의 늪에서 벗어난 반면 사회적 현실을 외면한 채 교회의 확장에 몰두해 온 주류 기독교는 여전히 그 족쇄에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 주류 기독교 지도자의 상당수는 북쪽 출신으로 월남한 이들이다. 그런 요인이 복합되어 생존의 논리로 반공주의를 내면화한 기독교가 반공주의를 표방한 역대 정권과 쉽사리 결탁한 것이다. 대북포용 정책을 펴는 최근의 정권들에 대해 친북정권이라 규정하며 거리를 두는 것은 그런 사연에서 비롯된다. 그 입장에서 북한 체제 및 그 체제가 공인한 교회는 인정되지 않는다. 그 ‘가짜’ 교회를 무너뜨리고 ‘진짜’ 교회를 세우는 것만이 최선이요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 입장에서 최근 남북교류는 우월한 물적 기반을 근거로 주로 물량공세를 위주로 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떤 형태로 보든 현재 민간의 남북교류는 정부당국의 주도권 아래 활발해진 양상이지만 그 자체의 동력은 이미 상실한지 오래이다. 그 점에서 진보적 기독교의 통일운동 역시 예외가 아니다.



4. 민간 통일운동으로서 기독교 통일운동의 동력 회복


엄혹한 분단체제하에서 민간 주도로 통일운동의 전선을 힘겹게 확장해 왔던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날 정부당국이 통일 협상과 절차상의 주도권을 쥐게 된 현실은 커다란 진전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국제적인 정세의 영향 탓도 있겠지만 그간 민간 통일운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민간 통일운동에 참여해 온 주체들은 보람을 느낄 만하다.  

그러므로 이제 민간의 통일운동은 정부에 통일정책을 지지하며 협력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최근의 형세는 마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것 같다. 특별히 기독교 통일운동 내부에서는 그와 같은 경향이 더욱 농후하다. 그것은 통일운동을 적극 이끈 기독교 진보세력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함과 동시에 현재에도 밀착되어 있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여전히 냉전 수구세력이 정부의 대북정책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만큼 정부당국의 대북포용 정책을 지지하는 일은 그 수구세력을 견제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화의 성과로 등장한 최근 정권들을 한계를 명백히 인식할 필요가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통일정책의 문제를 진단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더욱이 김대중 정부 이래 대북포용 정책이 사실상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대북포용 정책은 북한 체제의 급격한 붕괴에 이은 통합을 노리는 것과는 구별되지만, 사실상 ‘평화적 방식에 의한 자본주의적 흡수통합노선’ 이라 할 수 있다. 남북교류의 급진전이 남한사회의 경제적 활로를 여는 일환으로 이루어진 점, 그리고 실제로 남북 경제협력을 이유로 개성공단 건설을 비롯 많은 기업들이 북한에 진출하고 있는 현상을 주의 깊게 통찰해야 한다.        

그러한 통일노선이 점진적으로 진척될 때 결과가 어찌 될까? 점진적이 과정이라는 점에서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다소 완화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는 한, 오늘날 남한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빈부의 격차 등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격화되리라는 것은 뻔히 예측되는 결과이다. 이 점에서 정부의 통일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결코 최선의 길이 될 수 없다. 수구세력의 입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그와는 다른 입장에서 파국적인 결과를 예방할 수 있는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예컨대 개성공단에 한국 기업이 들어가 남북 경제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을 반길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노동자의 권리 보장 문제나 이윤 배분 문제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남북의 협력, 그리고 장차 이루어질 통일이 현재 남한의 주민에게든 북한의 주민에게든 결코 삶의 질의 저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북 주민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경제협력 방안은 어떤 것인지, 그 대안이 되는 모형을 만드는 일에 우리는 무심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고려 없이 현재 남한 기업의 논리를 그대로 이식하고, 그것이 장차 북한 사회 전역에 확산시킬 때 틀림없이 가혹한 재앙이 닥쳐올 수도 있다.

현재 정부당국에 주도권을 넘긴 채 자체 동력을 상실한 민간 통일운동이 새로운 활로를 열 수 있다면, 사실상 자본주의적 흡수통합이 빚어낼 가혹한 결과를 막아낼 대비책을 찾는 데 있다. 현재 기독교 통일운동을 비롯한 민간의 통일운동은 남북간 평화체제의 확립 및 군 축 등과 같은 정치군사적 측면, 또는 남북의 교류를 저해하는 국가보안법의 폐지 등과 같은 정치제도적 측면에서는 활발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으나, 사회경제적 차원에서의 남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제고하는 방안 또는 지속가능한 자연환경의 보존 방안 등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다. 그러나 이제 정치군사적 측면의 문제들 못지않게,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더 중요할 수도 있는 사회경제적 측면 그리고 자연환경적 측면의 문제들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을 이루는 데서 기독교 통일운동이 과거부터 견지해 왔던 입장은 대단히 소중한 자산이다. 기독교 통일운동은 민중의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화와 통일의 유기적 상관관계를 깊이 인식해 왔다. 그와 같은 인식은 기독교 통일운동이 독재정권과 싸우면서 도달한 소중한 성과다. 그 입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함으로써 정치경제적 실리만을 추구하는 정부당국의 통일정책의 한계를 뛰어넘는 전망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남북 사회, 그리고 통일 이후의 남북 사회가 어떤 모습을 지녀야할지 전망을 지니지 못한 채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관철하려는 입장에서 남북교류를 시도하는 입장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한 입장은 통일 과정에서의 평화공존과 통일 그 자체에 오히려 저해가 될 수도 있다. 그 점에서 북한선교론의 관점에서 북한교회를 재건하려는 시도는 통일운동의 맥락에서 적극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그것은 사실상 제국주의적 기독교 왕국의 확장 논리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평화공존과 통일을 저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위험성은 기독교 내에서도 자주 지적되고 있거니와, 북한 기독교 역시 남한 교회의 북한 교회 재건 방안에 분명한 거부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남쪽의 기독교가 중국내 탈북자들을 접촉하거나 기획탈출을 시도하는 경우도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으로 오고자 하는 탈북자들을 돕는 것은 인도적 견지에서 마땅한 일이겠지만, 단지 일시적으로 월경한 것에 지나지 않은 사람들을 접촉하여 기획탈출 시도함으로써 중국과 북한 당국을 경색시키고 그 당사자들을 더욱 곤경에 몰아넣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권을 명분으로 그와 같은 시도를 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 인권을 보호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선교적’ 과열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이 과연 선교일지, 또한 통일의 과정에 어떤 유익을 끼칠지는 의문시될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북한인권법’ 또한 심각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보편적 인권의 견지에서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북한인권법’은  노골적으로 북한 체제의 붕괴를 노리는 것일 뿐 실질적으로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의도한 것은 아니다. 인권을 빌미로 경제제재 조처를 더욱 강화할 때 실제로 인권과 생존권을 위협받는 것은 북한 주민들일 뿐이다. 여전히 반공주의에 사로잡힌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는 ‘북한인권법’을 반기고 있지만, 진정으로 북한 주민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실효성을 지닐 수 있는 신중한 방법을 찾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시사점을 발견한다. 상대를 변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그것은 먼저 스스로가 변화하는 방법이다. 자기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를 빼라는 태도(마태 7:3)여서는 안 된다. 반대로 스스로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자세(마태 7:17)여야 한다. 남북의 평화공존과 통일은 명백한 상대를 전제하는 만큼 성서의 이와 같은 교훈은 오늘의 복잡한 남북 관계 안에서도 여전히 실질적인 의미를 지닌다. 민중의 주권이 보장되는 민주화와 통일을 긴밀하게 연계된 것으로 인식한 기독교 통일운동의 관점은 성서의 그 교훈과도 상통한다. 남한 사회의 민주적 변혁이 평화공존을 위한 수적 조건일 뿐 아니라 향후 통일의 성격을 규정한다. 힘으로 강요하지 않고 따르고 싶은 귀감이 될 때 원하는 것을 평화롭게 이룰 수 있다. 민간운동으로 기독교 통일운동은 이 점을 새삼 환기함으로써 동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첨부파일 : 남북화해.hwp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