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2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6-03-10 13:31
조회
3966
* <천안신문> '종교인칼럼'(2006. 3. 6.) 기고요청을 받고 <주간기독교>에 쓴 원고를 수정보완했습니다(060303)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기도하는 일은 아름답다.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보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은 숭고한 행위이다. 더욱이 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더 아름답다.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새기게 해주고, 서로 협력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일구는 원동력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의 성장 배경에는 그 어떤 전도 전략보다도 그 기도의 위력을 믿는 신실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정말 기도에 열심이다. 하지만 문득문득 기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과연 진실한 기도란 어떤 것일까? 우리가 평소 드리는 기도형식에 어떤 문제는 없는 것일까?

연초 지역 목회자들의 신년하례 예배에서 특별기도 순서 가운데 하나를 맡았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였다. 외람된 이야기이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가장 많이 걱정하는 사람으로 비춰졌던 탓일까? 순서가 맡겨졌으니 군말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몫을 감당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평소에 그 기도형식에 이의를 가지고 있다. 대개 특별한 예배에서 특별기도는 틀에 박힌 순서를 따른다. 개인과 가정을 위한 기도에서 시작하여 교회를 위한 기도로 그 범위를 넓혀가다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로 마감을 한다.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과 범위를 확장해나가다가 마침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까지 기도하는 그 격식에 어째서 이의를 갖는단 말인가? 내가 이의를 갖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대개 그 범위의 확장이 나라와 민족에서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른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동체는 여러 가지 수준에서 정의될 수 있지만, 그 공동체를 정의하는 데서 흥미로운 하나의 관점은 고통을 체감할 수 있는 범위를 그 기준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최종적인 기도제목으로 삼는 기도형식에 나타난 한국 기독교인들의 고통 체감은 나라와 민족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다. 다른 나라나 민족의 고통 문제는 잠재적 의식수준으로까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동일한 맥락에 있는 것이지만, 기도의 범위를 확장해 가는 방식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나'를 확장해가는 방식이다. 내가 속해 있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와 민족으로 확장되어 가는 순서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개인적 욕망의 확장에 지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틈새가 없다.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타자에 관심을 기울인다거나 보편적인 관심사에 접근할 수 있는 여지가 그 기도형식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오늘날 국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 신앙마저도 무력해지는 현상은 사실 그와 같은 기독교인들의 잠재적 의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신앙의 국민화 또는 신앙의 민족화라고 할까? 나라와 민족을 지고의 대상으로 삼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면 부차화해버리는 신앙이다. 그와 같은 신앙에서는 저 이라크에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탄식은 잘 들을 수 없다. 그보다는 그곳에 한국의 군대가 파병되어 있다는 사실만 자랑스럽게 느낀다. 또한 우리의 삶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환경의 파괴와 그 파괴되는 환경 가운데서 소멸해가는 숱한 미물들의 신음도 들을 수 없다. 그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구 저편 내가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의 고통, 또는 보이지 않는 미물의 신음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진정한 깊이에 도달하지 않을까? 그 기대가 망상이 아니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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