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배아복제, 신의 영역 침범인가?-신학적 생명윤리에 대한 비판적 검토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12-02 00:18
조회
3665
*<진보평론> 26호(2005.겨울) 특집 원고입니다. 각주가 포함된 원문은 첨부파일로 올립니다.



배아복제, 신의 영역 침범인가?

-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신학적 생명윤리 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 신학)



1. 기독교계 생명윤리 논의와 교회대중의 의식 괴리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언론의 조명을 한창 받고 있던 지난 6월 한 기독교계 언론기관의 여론조사 결과를 따르면 서울시내 주요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의 61%가 황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명백히 반대의사를 밝힌 경우는 21.3%, 그리고 난치병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한 그 연구를 인정할 수 있으나 그 목적에 벗어나지 않도록 엄격한 제재가 필요하다거나 연구과정을 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의견은 17.7%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톨릭과 함께 개신교 역시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비판적이라 생각하는 추정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는 여론조사 결과이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 가톨릭 교회는 공식적으로 반대입장을 누차 표명해 왔다. 개신교는 그 자체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어 단일한 공식적 입장을 말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이 속해 있는 보수적인 개신교 연합단체인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은 일찌감치 반대 입장을 천명했다. 그리고 신학적 차원에서 이를 검토하는 견해들 역시 이른바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한 한국 기독교계의 공식적 담론은, 접근방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거의 동일한 비판적 입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의 그와 같은 공식적 담론과는 달리 교회 대중의 절대다수가 지지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기독교인들 개개인의 경우 교회의 공식적 입장보다는 일반여론의 추이에 더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결과가 아닐까 판단된다. 다른 여론조사 결과와 비교해보지 못해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기독교인으로서 변별력 있는 어떤 경향을 드러내기보다는 일반적인 여론과 크게 다르지 않는 판단성향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 나름의 신학적 근거에 입각한 교회의 공식적 판단과 일상을 살아가는 개별 신자들의 판단이 괴리되고 있는 현상은 신학적 윤리적 판단에서 더 깊이 생각해야 할 모종의 과제를 시사한다. 예컨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가톨릭 교회는 낙태에 대해 변함없이 불가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각기 사정에 따라 낙태를 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경우 낙태불가라는 가톨릭의 윤리적 규범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전적으로 효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실상 개별 신자들의 행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지니지 못하는 무력화된 규범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규범이 고집스럽게 고수되고 있는 사연은 무엇일까? 사실상 무력한 그와 같은 규범이 계속 고수되는 데에는 두 가지 사연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그와 같은 규범이 효력을 지닐 수 있는 조건을 미처 검토하지 못한 연유일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애초 그 규범 자체가 사람들의 구체적인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도하기보다는 그 규범을 내세우는 주체의 어떤 의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는 연유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다. 실행 가능한 규범으로서 역할할 수 있도록 그 조건을 탐색하면 되고, 그 탐색의 과정에서 논의 주체들 사이에서 충분한 대화를 하는 것으로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문제가 다소 복잡하다. 이런 경우 대개 그 규범을 내세우는 주체는 스스로도 그 숨겨진 목적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의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합리적인 대화의 여지는 거의 없고 완고한 규범적 주장만 되풀이되어 문제의 보완책을 찾기 쉽지 않다.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우리 사회의 쟁점이 되는 가운데 제기되고 있는 기독교계의 비판적 논의들은 대개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을까? 기독교계의 논의를 하나로 통틀어 말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지만, 현재 명백하게 배아복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기독교계의 입장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문제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듯하다. 개별 학자들의 경우 전자의 문제점을 지니는 반면 공식적 입장일수록 후자의 문제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까? 어쨌든 결과적으로 최근 개진되고 있는 기독교계의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관한 담론은 현실성 있는 윤리적 규범을 제시하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이 글에서는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사회적 쟁점이 되면서 기독교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생명윤리 논의의 문제점을 살펴보면서 다른 논의구도의 가능성을 탐색해보려 한다. 물론 이 글에서도 최종적으로 선택 가능한 어떤 윤리적 규범을 제시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기독교계의 신학적 생명윤리 논의구도를 유념하면서, 오히려 문제의 복잡성을 규명함으로써 진일보한 논의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이를 위하여 먼저 배아복제를 둘러싼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에서 윤리적 가치판단의 자명한 전제로 다뤄지고 있는 주요 쟁점들을 검토하면서 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들을 제안할 것이다. 이에 대한 검토는 배아복제에 대한 기독교계의 논의가 현실성 있는 윤리적 규범을 이끌어내기 위해 더 깊이 다뤄야 함에도 불구하고 미처 충분히 다루고 있지 못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차원이다. 다음으로 단순화된 기독교계의 윤리적 가치판단이 모종의 다른 의도를 함축하고 있지는 않은지 검토할 것이다. 그 다른 의도란 명백하게 고의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미필적 고의성을 지닐 수도 있다. 말하자면 생명존중의 기치(旗幟)를 내세우면서, 일반 신자들에게 필요한 윤리적 판단의 길잡이 역할보다는 기독교 그 자체의 위신과 권위를 강화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려는 것이다. 기독교계 공공의 윤리적 선언과 일반 신자들의 판단의 괴리는, 이상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것을 요구한다.  



2.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신학적 생명윤리 논의의 주요 쟁점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진척되면서 제기되고 있는 윤리적 쟁점들은 대체로 인간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 난자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 그리고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로 빚어질 여러 문제 등으로 집약된다. 그런데 기독교계의 논의는 인간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와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기독교계의 논의가 이 두 가지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그 나름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 때문이다. 신이 부여한 창조질서 안에서 모든 생명은 존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신학적 입장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는 인위적인 배아복제로 창조의 질서를 교란시킬 위험성을 지닌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인간생명 자체를 실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생명존중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체세포핵이식을 통해 형성된 배아가 잠재적인 인간생명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이런 전제에서 인위적으로 배아를 만드는 것은 신의 창조질서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배아를 실험 대상으로 삼고 경우에 따라 유기하는 것은 생명 그 자체를 임의의 실험대상으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사실상 살인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간주된다. 기독교계 논의에서 이와 같은 가치판단은 거의 의혹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대개가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우리가 배아줄기세포 연구로 인한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의 문제점을 검토할 때 불가불 그 기본 전제부터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1) 인간생명의 기점


생명의 기점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체세포핵이식으로 형성된 배아가 과연 잠재적인 인간의 생명체인가 아니면 그저 세포덩어리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다. 배아라는 말 자체가 시사하듯이 그것이 잠재적인 인간의 생명체에 해당한다면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인간의 생명을 실험대상으로 삼으로써 생명존엄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윤리적 이의제기는 별다른 의문의 여지없이 타당성을 갖는다. 반면에 그것이 최근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하는 입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배아'가 아니라 '체세포핵이식 구성체'에 해당한다면 생명존엄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는 윤리적 이의제기는 재고의 여지가 생기게 된다.

잘 알려진 대로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하여 생명의 기점은 수정후 14일경에 해당하는 원시선 형성 시점으로 제시되고 있다. 원시선 형성 이전에는 분화된 세포가 각기 독립적인 생명체로 발현될 수 있지만, 원시선 형성 이후에는 분화된 개별세포의 독자성은 사라지고 배아 그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생명공학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독자적인 생명체로서 발현 가능한 시점부터 생명체로 간주할 수 있을 뿐이지, 그 전 단계의 배아는 세포덩어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에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에서는 생명의 연속성을 근거로 수정순간부터 생명체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과연 이러한 논란이 생명에 관해 얼마만큼 진실을 규명해줄 수 있는 것일까?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그 기점을 하나의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의도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신의 창조질서 안에서 모든 생명이 존엄한 가치를 지닌다는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생명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생명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근거로서 생명의 기점 내지는 연속성에 관한 문제는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도 생명의 연속성을 근거로 하는 주장이 곤란한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사례가 있다. 호주의 가톨릭 신학자 노먼 포드는 수정후 배아가 일란성 쌍둥이로 분할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곤란을 느꼈다. 애초의 배아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간주했다면, 이후 쌍둥이의 인격적 정체성은 어찌 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결국 쌍둥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동안에는 세포덩어리들이 독립적인 생명체를 이루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고, 인간 생명의 시작은 수태되는 순간이 아니고 14일 뒤에 쌍둥이가 될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라고 했다. 이것은 생명의 연속성 논거가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확실한 윤리적 규범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과연 생명이 시작되는 기점을 더 엄밀하게 정의하면 문제가 해소될 수 있을까? 현재의 윤리적 논의는 사실상 그 기준을 엄밀히 하면 윤리적 문제들이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해 윤리적 이의제기를 하는 입장에서 생명의 연속성을 논거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수정' 순간부터 생명이 시작된다고 전제함으로써 사실은 일종의 자가당착을 범하고 있다. 생명의 연속성 논거는 원시선 형성보다 14일 앞선 시기로 연장하는 근거로만 활용될 뿐, 그 이전의 과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것 같으면 난자나 정자도 그 자체로, 심지어는 체세포마저도 잠재적 생명체로 간주될 수 있다. 요컨대 생명 현상은 하나의 단절된 기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현상이다. 현대과학은 적어도 수정 과정 그 자체만 하더라도 대략 24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결국 적절한 생명의 기점을 제시하거나 생명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 자체로 윤리적 규범의 근거를 완전하게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 사실상 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윤리적 논란은 마치 죽음의 기점에 관한 논란을 연상시킨다. 의학적으로 정의되는 뇌사가 죽음에 관한 완전한 정의처럼 통용되고 있지만, 그것은 장기이식이라는 또 다른 목적을 따른 정의일 뿐 인간의 죽음에 관한 완전한 정의일 수는 없다. 사회ㆍ문화적 맥락에 따라 인간의 죽음은 매우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고, 그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차원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간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 생명에 관한 논의가 배후의 어떤 동기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따져봄으로써 생명의 기원에 관한 특정한 입장이 어떤 파급효과를 갖는지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요컨대 생물학적 또는 의학적 차원으로만 생명에 관한 논의를 한정할 수 없으며 여타의 사회ㆍ문화적 차원에서 그 의미를 함께 논의해야만 한다. 생명의 기원에 관한 논의가 제기되는 그 맥락을 다시 깊게 고찰함으로써 실효성 있는 윤리적 규범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시도하여야 할 것이다.


2)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향한 기독교계의 또 하나의 큰 우려는 그것이 인간복제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이다. 신의 창조질서를 교란시키고 생명의 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는  바로 인간복제 가능성과 직결되어 있다. 줄기세포 추출을 위한 현재의 배아복제 기술로는 인간복제 가능성이 없다고는 하지만, 핵을 제거한 난자에 체세포핵을 이식시키는 배아복제  원리 자체가 복제양 돌리와 복제개 스너피의 탄생과 동일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그 우려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생명의 탄생은 오직 신의 영역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의 성장과 소멸 자체가 신의 영역이라고 믿는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는 의당 당황스러운 사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복제가 어떤 점에서 신의 창조질서를 교란시키는 행위가 될까? 신의 창조라는 신학적 언명은 그 자체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고 신학 안에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다. 신을 외재적 존재로 이해하기보다는 우주와 역사의 내재적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신학적 입장을 따를 것 같으면 신의 창조 행위는 일회적으로 완결되어 이미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우주와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은 우리가 이해하는 소위 자연적 과정과 배치되지 않는다. 그 점에서 창조의 질서와 원리는 자연적 질서와 원리로 이해해도 좋다. 그렇다면 창조의 질서에 위배되는지의 여부는 곧 자연적 질서에 위배되는지의 여부로 바꿔 물어도 좋을 것이다. 과연 배아복제는 자연적 질서를 위배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인위성인데, 그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경계가 확연하게 구분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의사들의 질병 치료행위는 분명히 인위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자연적인 질서를 벗어난 것으로 비난받지는 않는다. 인공수정 역시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는 수태의 한 형태로 간주된다. 그것들은 분명히 인위적인 것이지만 자연적 질서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자연적 질서를 벗어나는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닌 인위적 행위다. 배아복제 역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행위가 아니라 기존 생체의 재조합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위적이라는 것 자체로 신의 창조 질서 내지는 자연적 질서를 위배하는 것으로 곧바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전적으로 인위적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금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문명은 수없이 많은 인위적 노력의 결과로 이어져 온 것 아닌가? 그러므로 문제는 배아복제 그 자체가 신의 창조 질서 또는 자연적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자명하게 도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아복제 기술이 어떤 조건에서 파괴력을 지니게 되는지를 규명하지 않고는 그 자체만 들어 신학적 이유로 금기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복제인간 탄생 가능성과 관련하여 또 우려되는 점은 복제인간의 탄생이 인간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게 되리라는 점이다. 복제인간에 대한 우려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는 주로 신의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게 되리라는 우려에서 그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에 의해 창조된 인간이 지닌 '신의 형상'과 달리 인위적으로 복제된 인간은 '인간의 형상'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따라서 신이 부여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판단은 원본을 모사했지만 뭔가 결여된 사본으로서 복제인간을 전제한다. 복제인간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원본인간의 부속물로 간주되는 발상에서 비롯되는 판단이다. 그러나 유전자가 동일하다고 해서 동일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일란성 쌍둥이의 경우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복제인간이 탄생한다면 그 인간은 사실상 시차를 달리해 태어나는 일종의 쌍둥이와 같은 존재에 해당하며, 그 인간은 그 나름의 독립성을 갖는 인격체이다. 그러므로 탄생 경위 그 자체를 두고 존귀한 존재인 신의 형상과 소멸할 존재인 인간의 형상을 지닌 인간들을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앞서 말한 대로 복제인간 탄생과정에서의 인위성 자체가 문제되지 않는다면 복제인간 탄생 자체가 신학적으로 충격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또 다른 차원에서 복제인간의 문제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말하는 신의 형상을 이미 주어진 속성으로서 이해하기보다는 주변 환경 및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맺는 능력으로 이해하고 그와 같은 인간의 능력을 소홀히 하는 생명공학의 인식 자체를 문제시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신을 외재적 존재로서보다는 우주와 역사의 내재적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방식과 궤를 같이한 것으로, 적어도 신학적 입장에서 생명공학에 대한 비판 논거로서 진일보한 성격을 띤다. 생명공학이 취하고 있는 유전자결정론을 비판할 수 있는 논거로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자결정론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공학적 인식과 그 결과로 탄생할 수도 있는 복제인간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복제인간 자체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스스로 관계를 맺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처럼 간주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스스로 관계 맺는 능력을 갖지 못한 채 원본인간에 종속된 인간들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우려하여 복제인간을 반대하는 논리는, 그 의도와 어긋나게 사실상 유전자자결정론에 매인 생명공학과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사실상 생명공학의 인식과 다르지 않은 논리 기반에서 복제인간의 탄생이 인간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보기보다는 그 인간복제 기술이 어떤 조건에서 인간존엄성을 훼손할 수 있는지를 더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또 한편 유전자복제로 인한 복제인간의 탄생보다 유전자조작으로 인한 유전자치환인간의 탄생이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복제인간이 원본인간의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된 인격체라면 사실 복제인간의 유용성은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유전자조작은 훨씬 파급력이 클 수 있다. 유전자의 기능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그 결함 또한 밝혀진다면 누구나 그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교체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대로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람과 누릴 수 없는 사람이 결정되고 거기에서 서로 다른 인간들이 구별지어질 가능성이 있다. 물론 유전형 자체가 곧 표현형과 기계적으로 동일시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고, 따라서 해결하고자 하는 유전적 결함이 단순히 유전자조작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 역시 의문이다. 하지만 현재 유전학의 결론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전자조작이 행해진다면, 정말로 인간들 사이에는 서로 다른 인간들의 구별이 발생할 수도 있다. 오히려 유전자복제로 인한 이종인간보다 유전자조작으로 인한 이종인간 출현의 가능성이 더 높은 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의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의 문제는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우리가 생명의 고귀함과 인간 존엄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도 검토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뚜껑 열린 판도라 상자  


기독교 신학의 입장대로 창조의 질서 차원에서든 아니면 자연적 질서의 차원에서든 생명의 존엄성을 옹호하기 위한 윤리적 규범의 근거를 이끌어내기 위한 이상과 같은 노력은 진지하고 그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윤리적 규범의 근거로서 자명하게 여기고 있는 전제들이 그 자체로 자명하지 않다. 기독교계의 논의가 주로 생명 기점에 관한 문제와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에 불가불 그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밖에 없었는데, 위에서 지적한 문제들 외에도 위 논의와 관련해서 더 검토해야 할 문제들도 있다. 예컨대 생명의 신성함이나 인간의 존엄성 등의 문제는 그 근거를 더 충분히 검토해야만 하는 주제이다. 생명의 신성함은 모든 형태의 생명에 해당하는 것인지 인간의 생명에만 해당하는 것인지, 모든 형태의 생명에 해당한다면 그 전제에서 인간생명의 배타적 우월성은 과연 인정될 수 있는지, 어떻게든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울 수 있다면 그 존엄성의 근거가 무엇인지 등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 모든 과제들은 배아줄기세포 연구로 촉발된 윤리적 논의에서 기독교계의 논의가 그 고유한 신학적 입장과 관련하여 더 탐구해야 과제들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논의들은 대체로 제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논의들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판도라의 상자 뚜껑은 이미 열렸다. 기독교계의 신학적 생명윤리 논의는 그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 가장 큰 문제다. 생명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복제인간의 탄생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미 판도라 상자의 뚜껑이 열린 상황에서 더 화급을 다투는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난자제공 여성의 인권 문제와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로 빚어질 여러 문제 등은 사실 지금 당면한 문제들로서 화급을 다투고 있다. 놀랍게도 기독교계의 신학적 생명윤리 논의는 이러한 문제들을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

앞에서 생명공학 기술이 과연 어떤 조건에서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며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지 그 조건을 따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성계와 시민사회 안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난자제공 여성 인권 문제는 생명공학의 시도, 구체적으로 지금 쟁점이 되고 있는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어떤 메커니즘에서 어떤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지를 드러내주고 있는 하나의 사례이다. 자본과 생명공학의 공모 관계 안에서 난자의 상품화와 동시에 여성의 몸에 대한 착취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 문제이다. 결국 신학적 차원에서 그렇게 중요하게 강조되는 창조질서와 생명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은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라는 조건하에서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기독교계의 신학적 생명윤리 논의가 현실성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그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배아줄기세포 연구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국민적 여론, 그리고 그와 같은 여론의 추이와 별 다르지 않은 기독교인들의 태도 배후에는 그 연구성과가 갖는 경제적 부가가치 효과에 대한 기대심리가 깔려 있다. 정말 절실하게 난치병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는 심리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보다는 민족주의적 열기와 결합된 경제적 효과에 대한 기대심리가 더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뒤집어보면 생명공학이 자본에 무방비 상태로 내맡겨지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거의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그대로 온존시키거나 강화하는 가운데 자본과 생명공학의 공모가 이뤄질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다. 전적으로 자본의 이윤추구 목적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적 불평등 관계와 현재의 의료체계 아래서 진행되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표방하는 바와 같이 난치병치료의 목적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그 혜택이 극소수에게만 돌아가는 전시효과를 가져올 뿐, 난치병의 고통을 호소하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가중된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다. 이런 사태를 미리 내다보고 대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생명존엄의 가치를 내세울 때 그것은 비로소 생명의 윤리로 몫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3. 생명존엄의 기치(旗幟) 뒤에 가리어진 의도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가 그 신학적 입장 때문에 생명 자체에 대한 이해 문제나 복제인간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은 납득할 만하지만, 그러한 근원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것이 필연적으로 현실의 사회적 관계 문제를 검토하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윤리란 어차피 관계를 문제삼는다. 더욱이 기독교 신학에서는 사회적 정의와 인권의 문제가 언제나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볍게 한 걸음만 내딛는 것만으로도 현실의 사회적 관계 문제에 접근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성 있는 생명윤리의 규범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기독교계의 공식담론에서 그와 같은 접근방식을 찾아보기 어려운 진정한 사연이 무엇일까? 추상적인 생명존엄의 가치만을 내세울 뿐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 가치를 실현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를 충분히 하지 않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

매우 조심스러운 진단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이면에 권력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나름의 상황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기독교에 악재이며 동시에 호재이다. 기존의 신학적 관념을 뒤흔들 만한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악재이지만, 정반대로 바로 그 때문에 생명존엄의 기치를 한껏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호재이다. 일반 신자들이 갈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선언적인 명제로 갈등의 상황을 종식시키려는 태도는 그 선언 주체의 정당성만을 내세우는 것일 뿐 실제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말 악재로 받아들인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의 상황, 그리고 일반 신자들의 갈등의 상황에 대해 진지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이미 예정된 결론만을 계속 되풀이함으로써 더 이상의 논의를 사실상 진전시키기 어렵게 하는 것은 다른 저의를 갖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으며, 그 태도는 사실상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호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윤리 도덕적 정당성을 자랑하는 호기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추상적이고 근원적인 생명의 본질 문제에 집착하며 현실의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안에서의 갈등의 상황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는 기독교계의 태도 배후에는 일종의 권력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얼마 전에 가톨릭 교회는 윤리적 논란이 많은 배아줄기세포 연구 대신에 윤리적 논란이 없는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위하여 1백억 원의 기금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맞장구를 치듯 보수적인 개신교의 연합단체인 한기총도 성체줄기세포 연구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선의의 경쟁을 하니 아름다운 모습일까? 어쩌면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은 사태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모종의 드러나지 않은 의도를 감지할 수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태 6:3)는 미덕과는 거리가 멀게 서로 경쟁하듯이 공표하는 태도는 정말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말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선행에 몸소 앞장선다는 태도를 만천하에 공표함으로써 윤리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이다. 스스로 믿고 있는 것처럼 선택한 대안이 더 이상 논란의 여지없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잠재적 생명체를 유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체줄기세포 연구가 그 자체로는 윤리적 논란의 소지가 거의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적 관계의 맥락에서 파악하자면 그 연구 역시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거의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다.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지지한다 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산적해 있다. 그 문제의 상황을 유념하지 않은 채 성체줄기세포 연구만이 확실한 대안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복잡한 문제의 상황을 단순화시켜 사태를 호도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의 상황을 단순화시켜 확실한 대답을 주는 방식은 사실 오랜 역사를 통해 기독교가 체득한 놀라운 비결이다. 천당과 지옥, 선과 악, 축복과 저주를 명확하게 갈라놓고 자신을 축복받은 선의 편에 놓는 통속적 교설은 기독교에서는 매우 익숙한 대중설득 방식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문제해결 방식은 세계 안의 복잡한 문제들을 진정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자신의 체제와 자신의 세계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통용되어 왔다. 오늘 미국의 정치를 지배하고, 따라서 세계의 정치를 지배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논리, 네오콘의 논리가 바로 그런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현실을 무시하는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와 그 주장이 혹 그런 과오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 것일까?



4. 고통받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가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다거나 혹은 심지어 숨겨진 저의를 지니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현실의 사회적 관계의 맥락을 더 심각하게 유념하고 그 대안을 찾는 노력을 서둘러야 한다. 그 노력은 기독교계의 공식적 담론과 무관하게 별다른 문제의식을 지니지 못하는 많은 기독교인 개개인들을 설득하고 어떤 전망을 제시해주는 데도 절실히 필요하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고 여러 생명윤리 논의와의 소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는 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역시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종교로서 기독교 신앙의 본령에 부합하는 일일 뿐 아니라, 생명공학과 자본의 공모로 빚어질 문제의 상황에서 가난한 민중들이 고통을 겪게 되리라는 현실적 필연성의 요구에 부합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이 경우에도 누가 가장 고통받는 사람일 것인가 판단하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생명현상 자체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현실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우선 순위를 분별하는 것 역시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지금 당장 난치병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의학적으로 치료 가능하지만 경제적 형편으로 치료혜택을 누릴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누군가의 질병치료를 위해 자신의 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등등, 이들 가운데 누가 과연 우선권을 갖는지 우리는 단순히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이를 헤아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실제로 고통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생명의 윤리를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근원적인 생명현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문제에 비해 결코 소홀히 될 수 없는 문제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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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