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추상적 생명윤리를 넘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12-07 01:46
조회
3290
* 교육복지연구원 회보『나눔과 성장』제39호(2005.12) 특집논단 원고


추상적 생명윤리를 넘어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윤리적 문제제기의 정당성


새튼 교수의 결별 선언 이후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연구 관련 보도가 거의 매일 언론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연구 윤리 문제가 발단이었는데, 이제는 연구 자체의 진위 논란에 보도 윤리 문제까지 제기되어 이러쿵저러쿵 공방이 벌어지고 있어 도무지 혼란스럽기만 해 보인다. 그 바람에 애초 제기되었던 윤리 문제는 부차화되어 버리고 미궁의 진실게임에 돌입해버린 듯한 상황이다.

방송사의 보도로 밝혀진 윤리적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연구원의 난자가 제공되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제공된 난자들 가운데 일부가 사실상 매매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째서 윤리적인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 윤리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헬싱키 선언> 등을 포함한 국제적 윤리 규준은 인체실험에서 피험자의 자발적 동의를 중요한 요건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연구 종사자의 경우 자발적 동의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연구자가 피험자가 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는 것이 관례다. 연구의 최종 책임자가 사전에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양해 받을 수 있기는 하나, 결과적으로 사실이 확인되었고 그것은 윤리적 흠결이 된다.

다음으로 연구에 사용된 난자 일부가 매매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덜 받고 있지만, 사실 더욱 심각하고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난자 매매를 금지하고 있는 생명윤리법이 시행되기 전에 이루어진 일이고, 또한 난자 제공자의 자발적 동의를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그 제공 동기가 경제적 빈곤이 분명하다면 배아줄기세포 연구 성과가 사회에 미칠 파장 가운데 가장 우려되는 문제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와 의료체계 안에서 가난한 여성의 몸의 착취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장기시장과 난자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는 배아줄기세포 연구로 암암리에 난자매매가 횡행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사례로서 심각성을 띠고 있다.

방송사의 보도가 바로 그와 같은 윤리적 문제제기를 하려 했다면 그것은 정당하고 적절한 것이었다. 지금 이상한 공방전으로 흘러가 그 문제제기가 퇴색되어버리고 있는 듯하여 안타깝지만, 그와 같은 윤리적 이의제기는 국익을 내세워 나무랄 일이 아니다. 보편적인 윤리 규준은 국익을 뛰어넘어 인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준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추상적 생명윤리의 한계


황우석 교수의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난치병 치료의 신기원을 연 연구성과로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도 사실 종교계와 시민사회계에서는 끊임없이 윤리적 이의제기를 해 왔다. 하지만 그 윤리적 이의제기는 세간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국운을 좌우할 수도 있는 기념비적인 연구에 흠집을 내려는 딴지걸기 정도로 치부되어 온 셈이다. 그러나 한편 그 문제제기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접근방식 자체가 갈등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판단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탓도 있다. 모든 윤리적 논의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의 생명윤리 논의는 현실의 복잡한 상황에 비해 너무나 추상적이다.

생명의 존엄성을 기본 전제로 하는 기독교계의 생명윤리는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중요한 쟁점으로 삼고 있다. 하나는 생명의 기점에 관한 문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 문제이다. 생명의 기점 논란은 난자에 체세포핵을 이식해 만든 배아가 잠재적 인간생명체인가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다. 생명윤리적 접근은 생명의 연속성을 근거로 그 배아가 잠재적 생명체라고 주장함으로써 배아줄기세포 연구가 인간생명을 유기하거나 심지어 사실상 살인행위를 저지른다고 주장한다. 복제인간의 탄생에 관한 우려는, 현재의 체세포이식 기술로는 복제인간의 탄생 가능성은 없다고 하지만 복제양 돌리와 복제개 스너피가 동일한 원리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생명의 연속성 논거로 볼 것 같으면 정자나 난자라고 해서 잠재적 생명체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하며, 따라서 그 논거로 자명하게 수정순간부터 생명이 시작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생명현상은 일련의 연속되는 과정일 뿐이다. 또한 복제인간은 흔히 우려하는 것처럼 원본인간의 부속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란성 쌍둥이들이 유전자가 동일하다 해서 동일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독립된 인격체들인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복제인간의 탄생 자체가 인간의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유전자치환 인간이 그 유용성이 높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한 파급 효과가 클 수도 있다.

어쨌든 이와 같은 반론은 생명윤리가 자명하게 전제하는 판단근거가 그렇게 자명하지 않기에 여러 가지 현실적 조건 안에서 그 타당성을 검토 받아야 할 소지를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생명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대의만으로 충분한 판단근거를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그와 같은 생명윤리의 주장은 그 선언 주체의 윤리적 정당성을 내세우는 역할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복잡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판단근거는 제시해주지 못한다. 그것이 추상적 생명윤리의 한계다.


고통의 현상에 대한 주목


현실감을 결여한 추상적 생명윤리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의 고통, 구체적으로 인간의 고통 현상에 주목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매우 구체적인 어떤 조건 아래서 경험된다. 따라서 그 고통을 야기하는 조건을 헤아리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방안을 찾아야 한다. 또한 특정한 조건 안에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동할 때 어떤 경우를 우선 순위로 선택해야 할 것이며 궁극적인 해결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 탐색해야 한다.

예컨대 지금 당장 난치병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 의학적으로 치료 가능하지만 경제적 빈곤으로 치료혜택을 누릴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 누군가의 질병치료를 위해 자신의 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그것도 그야말로 '숭고한' 자발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경제적 빈곤으로 자신의 몸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 등등, 이들의 고통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가볍고 어느 것이 더 무겁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이를 헤아리는 것은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과제이다. 이것은 근원적인 생명현상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문제에 비해 결코 소홀히 될 수 없는 문제이며 오히려 시급한 과제이다.

추상적 생명윤리나 열광적 국익논리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이 과제를 두고 지금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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