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우리는 부지런해야만 하는 것일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8-18 18:26
조회
3206
한국기독교장로회 농민선교목회자연합회ㆍ생명선교연대 여름 대회 강연

2005년 8월 17일(수) 저녁 7시 / 호텔 설악파크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우리는 부지런해야만 하는 것일까?


<맏딸로 태어난 그대들에게>


불행한 시대에

맏딸로 태어나

집안의 기둥으로 살았던 그대

근엄한 꼬마 엄마, 정숙한 자매여

그대의 엄함과 숙함에 축복 있으라.


그러나

모범생 그대는 자동 반사 인형처럼

질서를 잡아야 하는 인간

휴강 못하는 충실함에

그릇 채우기에 바쁜 그대 뒤를

가부장의 미소가 따라다닌다.


'질서'에 틈새를 낼

기발한 전략은

정적 속에, 공상 속에서 나온다.

빈곳에서 온다.

하릴없이 떠다니는 방랑길에서

게릴라 전략이,

시가,

아 많은 것들은 빈둥거리는 사이에 온다.


우리 시대의 음모는

우리를 바쁘게 하는 것

의무감에 시달리는 그대여

우리로 하여금 놀게 하라

그대 '큰자아'이기를

'큰타자'이기를

이제 그만 포기하라.(1991.4)


- 조혜정,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 2 - 각자 선 자리에서』, 또 하나의 문화, 1994.  


1. 이율배반 또는 모순


충분한 휴식을 누리려고 하는 수련회에 어이하여 머리를 아프게 만들지도 모르는 강연을 집어넣었을까? 그냥 훌훌 털어 버리고 마냥 놀고 휴식을 취하면 안 되는 것일까? 그러면 의미없는 수련회가 되고 마는 것일까? 언제나 털어 버리지 못하는 의무감과 사명감 탓일까? 늘 진지하게 의미를 추구하는 버릇에서 비롯된 조바심 내지는 강박감 탓일까?

게다가 그런 조바심과 강박감에서 해방을 시켜줄 만한 강사도 아니고 오히려 그 조바심과 강박감을 더 부추길지도 모르는 강사를 선정한 사연은 또 어인 일인가? 입으로는 "좀더 쉬고, 좀더 놀자!"고 외치지만, 실제 삶은 언제나 수많은 과업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까?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그래서 오히려 더 절실한 목소리가 나올 것이라 기대한 탓일까?

그러나 이 과제를 떠맡은 당사자에게는 거의 '테러'를 당한 듯한 느낌이다. '테러'를 당할 만한 대상이라도 되었으니 나름대로 그 존재의의를 확인받은 셈일까? 인생의 경륜이 풍부하다면 그 경륜을 밑천 삼아 굳이 애쓰지 않고도 영감을 주는 지혜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그럴 처지가 못되고, 어떤 주제를 맡을 때마다 번번이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처지에서는 '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사실은 무지막지한 중노동이다. 휴식을 취하며 수련을 하려는 분들에게 한마디라도 쓰잘데 있는 소리를 하기 위해서 나는 쉬지 못한다.

이래저래 어긋나기만 한 것 같은 구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뜻이 있으리라. 나는 어차피 그렇게 묻는 데 익숙한 사람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농사꾼처럼 생겼고 농촌에 살고 있으면서도 농촌목회를 하지 않으니 '농목'에 끼지도 못한 처지, 민중신학을 말하고 그 신학적 지향을 따라 목회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발 늦게 목회를 시작한 바람에 '생선연'에도 끼지 못한 처지, 그러니까 농촌교회와 민중교회의 형편을 대개 알 만하면서도 '딴짓'하느라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을 끌어들이려는 모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해 과제를 떠맡은 듯하다. 얼떨결에 봉변을 당한 듯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뜻이 그렇다면 겸손하게 기대되는 몫을 담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하여 생각의 실마리를 던져보려고 한다.


2. 우리를 허덕이게 만드는 삶의 대안은?


앞에서 조한혜정 교수의 제법 오래된 글귀를 인용했다. 내가 그렇게 그 글귀를 접한 지도 이미 십 년은 다 된 것 같다. 처음 그 글귀를 대했을 때 한편으로 통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말 뒤통수를 강력하게 얻어맞는 기분이기도 했다.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고, 사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교훈이란 곰곰이 생각해보면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대부분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알고 있는 사실이 어느 순간 큰 깨달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시인 김춘수는 그렇게 노래한다.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던 존재가 어느 순간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존재가 되는 순간을 그렇게 노래한다. 우리들의 깨달음이란 것도 그와 같은 이치일 것이다. 다 알고 있지만 그 아는 것이 나의 삶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었는데, 어느 순간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고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일 게다. 조한혜정 교수의 글귀는 사실 다 알만한 것이었는데도, 새삼스럽게 그렇게 나에게 충격을 가하며 깨달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깨달음도 부질없는 것일까? 그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삶은 별로 달라진 게 없으니 말이다. 여전히 의무감에 시달리고 여전히 많은 일들로 번잡하다. 그 경고성 교훈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돌이키지 못하는 우리의 삶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교훈이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삶을 옥죄는 어떤 틀 자체가 문제일까?

그 삶의 틀을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 자체가 여전히 우리에게 고단한 노동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시대 무위(無爲)는 그저 단순히 유위(有爲)에 대립되는 어떤 것이 아니고 부작위(不作爲)는 작위(作爲)에 대립되는 것은 어떤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유위와 작위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지만, 우리가 그렇게 몸을 맡겼다가는 필경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실 아닐까?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는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를 인간의 자연적 내지는 본능적 욕구에 부합하는 당연한 현상인 듯이 간주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자연적 질서의 궤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궤도를 벗어난 인간의 삶의 방식 자체를 마치 '자연적'인 듯이 간주하고 있는 것이 오늘 자본주의 체제이다. 그러니 물 흐르는 대로 우리의 몸을 맡겼다가는 자본의 격랑에 내 몸을 맡기기 십상이다. 내가 언필칭 '도사'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자본의 음모를 들추어내고 그에 저항하지 않은 무위로서 자연주의와 생태주의 또는 영성주의의 위험성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오늘 동서양을 막론하고 유행하고 있는 영성운동은 사실상 자본주의의 하위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슬라보예 지젝, 『믿음에 대하여』, 동문선, 2003)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참선이 군사훈련의 한 방편으로도 활용된 역사와 현실을 생각하면 정말 참담해진다.

어허! 어째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고? 우리의 삶의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째서 늘 허덕여야 하는가를 생각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우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거대한 힘에 저항하는 삶이 결코 한가로울 수 없는 사연을 해명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그 삶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자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의 조건을 냉정하게 헤아리자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우리를 허덕이게 하는 삶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무위를 부르짖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은 자본의 마수에 투항하는 것을 막으면서도 정말 마음의 평화, 삶의 평화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을 이루기 위해 저항하는 삶이 대단한 극기를 요구하고 고단하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삶은 필연적으로 메마르고 허덕여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 세력에 저항하고 투쟁하면서도 여유와 넉넉함을 누릴 수는 없는 것일까? 그것이 우리의 주요 관심사이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대안적인 삶의 방식은 무엇일까?


3. 노동 중독증, 그리고 과업지향적 인간


대안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우리들이 처해 있는 객관적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그 현실 안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는 어째서 늘 허덕이며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연구하고 있는 독일 학자 홀거 하이데는 한국의 노동사회를 진단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노동 중독증'을 말하고 있다(홀거 하이데,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 박종철출판사, 2000). 우리가 흔히 병리현상으로 알고 있는 중독증을 노동사회에 적용하여 그 구체적 양상을 진단해보려는 시도이다.

홀거 하이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몇 가지 사람들의 유형에 주목한다. 첫째 너무나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흔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이 부류에 해당하는데, 이들은 항상 육체적으로 고달프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다. 둘째 일만 보면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어떤 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며, 그래서 항상 의기소침해 있다. 셋째 평생 동안 일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정년퇴임 후에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모르며 참을 수 없어 한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정년퇴임 이후 2년 이내에 사망하는 비율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 이 세 가지 부류에 공통된 점이 바로 '노동 중독증'이다.

모든 중독의 심층적 원인은 두려움이다. 다시 말해 중독 현상은 내적인 자율성의 결핍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인간의 내적 자율성의 결핍과 두려움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자율성을 강화시켜온 근대 산업화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어 왔다. 인간 자신이 내부에 신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곧 스스로가 자연적 질서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영성화로도 불리는 이와 같은 과정은 모든 외적 지배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은, 구체적으로는 개개인이 신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결국 나 아닌 모든 세상의 모든 대상을 객체로 변화시켜버렸다. 그와 같은 조건 안에서 개개인간은 모두가 격렬한 경쟁관계에 빠지고 말았다. 사실상 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항상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어린아이가 부모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자신이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안정감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결국 나 아닌 모든 것을 그저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인간은 스스로 어찌할 줄 모르는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고 그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수단을 찾게 된다. 그것이 모든 중독 현상의 배경이다.

자본주의와 중독은 두말할 것 없이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중독을 조장할 뿐만 아니라 중독 자체를 먹고산다.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본질적으로 중독의 체제이다. 중독체계로서 자본은 욕망을 만들어내고 재생산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본은 사람들에게 그 진정한 내면의 욕구 충족이 아니라 대리 만족을 시켜줄 만한 수단들을 만들어낸다(앞의 책 253쪽에서 직접 인용). 수많은 기호품들과 놀이, 그리고 이제는 정보마저도 중독물이 되어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중독을 요구하는 사회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홀거 하이데는 노동마저도 그렇게 강력한 하나의 중독물이 되어 있다고 진단한다. 노동 중독증이란 일을 많이 할 뿐만 아니라 일 또는 그 성과를 통해 자기 가치와 자기 정체성을 찾는 증상이다. 그것이 하나의 병리 현상으로서 증독증이 되는 것은 그 사실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홀거 하이데는 특별히 한국, 일본, 대만 등에서 흔히 나타나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이 노동 중독증을 강화하고 있다는 데 주목한다. 사실 개별적 차원에서 노동 중독증은 그 초기 단계에서는 매우 건강한 것으로 인지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보고 누가 비난을 하는가? 그것은 권장되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치켜세움을 받는다. 그러나 강도 높은 노동으로 심신을 소진하게 되었을 때야 그 심각성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홀거 하이데는 막판에 몰아부치기식으로 일하는 방식은 그 노동 중독증이 상당히 진전된 단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진단한다. 하지만 노동 중독증의 마지막 단계는 완전한 무력감과 소진의 상태일 것이다.

지금 우리가 특별히 유의하는 것은 그 노동 중독 현상이 이른바 노동사회 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독을 강요하는 사회 문화 환경을 공유하고 있기에, 바로 그 사회를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 진영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고,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바이다. 노동 중독증에 걸린 사람이 각기 맺고 있는 관계들 안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까? 예컨대 가족 안에서, 일터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어떤 영향을 끼칠까? 여러 가지 상황을 예측해볼 수 있지만, 그 당사자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다. 화끈하게 일하고 화끈하게 노는 사람, 성취욕이 매우 강한 사람, 소위 과업지향적인 인간, 이들은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노동 중독증에 걸려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운동을 사유화한다고 평가받는 인물들은 주로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다. 그렇게 주도적인 지위를 지니지 못하고 늘 일에 치여 있는 듯한 사람들 역시 노동 중독증에 걸려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들도 같이 일하는 동료나 가족 등 다른 사람을 배려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기중심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노동 중독증은 인간 자체를 소진시키고, 인간 관계, 그리고 나아가 자연 자체를 파괴한다.

      

4. 힘에 대한 숭배, 그리고 성장신화


파괴적인 결과가 예측됨에도 불구하고 중독을 강요하는 사회로부터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말한 대로 중독을 조장하는 체제 자체의 위력도 문제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위력 또한 문제이다.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가 있다. 열심히 일한 개미는 추운 겨울에 먹고 살 걱정이 없었지만, 한가하게 노래나 부르던 배짱이는 구걸을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그런데 요새 떠도는 이야기는 다르다. 개미는 허리디스크에 걸려 몸져눕고 배짱이는 그 노래가 떠 한몫 톡톡히 했단다. "나 바빠!"라고 하면 "그래, 바쁜 게 좋은 거지!"라고 응수하지만, "나 한가해!" 하면 이상한 사람 대하듯 하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버릇이다. 그러니 신종 "개미와 배짱이" 이야기는 그저 우스개 소리 정도로만 들린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노동의 윤리를 강조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근대 자본주의의 윤리적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와 같은 노동사회는 각 나라마다 문화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범지구적으로 확대되었다. 그와 같은 노동사회에서 부딪히고 있는 문제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경험적으로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런데 그것은 비단 자본주의 체제에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다. 구 사회주의 체제 국가들 역시 동일한 칼빈의 노동윤리를 사실상 채택하였다(차문석, 『반노동의 유토피아 - 산업주의에 굴복한 20세기 사회주의』, 박종철출판사, 2001).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하였던 현실 사회주의는 실제로 생산력을 극대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동일한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다. 소련의 스타하노프 운동, 중국의 대약진운동, 북한의 천리마운동(그리고 남한의 새마을운동?) 등은 모두 동일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노동영웅이 칭송을 받았고 모두가 그렇게 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그 신성한 노동의 깃발이 펄럭이던 그 사회에서 사실은 수많은 담합과 태업이 횡행했다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노동윤리는 이제 맹목적으로 신봉되어야 할 가치로서보다는 오히려 그 병폐를 의심받고 있는 형편이다.

한편 우리 사회의 경우에는 자본주의의 지구적 확산과 더불어 그와 같은 노동윤리가 아무런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 없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노동사회 연구자들은 한국의 근대화를 추동시킨 노동윤리가 꼭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사실 그 점은 이미 사무엘 헌팅턴 역시 주장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국가의 발전에는 근면ㆍ가족ㆍ노동ㆍ규율 등을 강조하는 유교적 윤리가 큰 몫을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사무엘 헌팅턴, 『문명의 충돌』, 김영사, 1997). 이렇게 보면 가장 일찍 서구의 근대화 논리를 수용한 일본, 가장 광범위한 기독교 인구를 가진 한국이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데는 그에 걸맞는 윤리적 근거를 이미 탄탄하게 갖추고 있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경제적 발전을 윤리적 근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순전히 윤리적 기초라는 점에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지금 이와 같은 사실을 굳이 거론하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우리가 앞서 말한 노동 중독증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매우 역동적인 사회의 한 단면으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가치관이 우리들에게는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그 가설들을 전제하고 새삼 상상해보시라! 노동과 근면을 강조하는 유교사회 안에서 역시 동일한 가치를 주장하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부지런한 사람들일까? 실제 한국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부지런한가? 숨막힐 지경 아닌가?

단순한 비아냥이 아니다. 실제로 한국의 기독교는 '힘의 종교'로 수용되었다. 초기 한국 기독교의 선각자들은 나라를 문명화(사실상 서구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을 기독교 신앙에서 찾았다. 최근 박노자의 『우승 열패의 신화』는 비단 기독교 선각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대 지식인들이 사실상 '힘 숭배'에 해당하는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해 민족주의 논리를 형성하였고, 오늘날까지도 그 유산은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근대화 과정과 함께 성장을 해온 한국 기독교는 한국 근대화의 최대의 협력자요 동시에 그 적자 노릇을 해 왔다. 힘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다. 특별히 박정희 시대 돌진적 근대화와 기독교의 놀라운 성장은 우연한 별개의 사실이 아니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실이다. 아마도 '삼박자 축복'은 '민족/국가주의ㆍ발전주의ㆍ복음주의'의 '삼박자 축복'이라고 번안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번지는 듯싶고 다소 비약이 있는 듯싶지만 역시 다른 뜻이 아니다. 우리가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인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 더불어 신앙적으로 정당화된 그 가치는 현실의 여러 가지 기제들을 통해 강화될 수밖에 없었고, 더욱 강력하게 내면화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잘 살아보세!"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앙의 보상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새벽종과 새마을 운동의 새벽종은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그렇게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가치를 뒤집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아 나서는 것이 우리에게 더더욱 어렵게 느껴지게 된 한 사연이다.

우리에게 대안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또는 복음이지만, 현실에서 그것은 전혀 엉뚱한 가치들을 정당화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정당화했던 엉뚱한 현실의 가치를 부정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 현실적 적합성을 갖는 가치를 찾으려 하는데 그 일이 쉽지 않다. 아니, 그것을 찾는 일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일이 어렵다.


5. 일상의 행복, 그리고 조화로운 삶


우리에게 목표는 분명하다. 우리를 허덕이게 만드는 체제와 삶의 방식을 부수고 정말 자유롭고 넉넉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로베르토 베니니의 작품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 영감을 불어 넣어준 것으로 알려진 트로츠키의 유언장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과거의 동지였던 스탈린으로부터의 죽음의 위협 때문에 멕시코로 망명했던 트로츠키가 결국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목숨을 잃기 바로 얼마 전에 남긴 유언장의 한 대목이다. "...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 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벽 아래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인생을 충만하게 즐기도록 하자꾸나."(1940년 2월 27일 레온 트로츠키) 성서 구절을 끌어올 것 같으면 한이 없지만, 전도서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다"(3:12~13). "빛을 보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해를 보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11:7). 우리는 그렇게 평범한 일상의 풍경을 목격하고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사실 그런 삶을 위해 저항하고 헌신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며칠 전 20여 년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 노동운동가와 짤막한 이야기를 나눴다. "인생이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는 이야기였다. 자본의 공세전략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응전략을 찾고 싸우고..., 그렇게 이어지는 나날 속에서 느낀 감회였다. 학생시절 새로운 현실을 알고, 새로운 인간을 보면서 전율했던 그 느낌을 다시 찾고 싶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자본의 공세에 맞서는 저항적인 삶에 대한 회의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만 규정 당하는 삶이 전부는 아니라는 뜻일 게다. 우리를 한시도 내버려두지 않는 자본의 격랑에 맞서 자기를 지키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정말 나의 삶을 산다는 뿌듯함을 누리고픈 기대는 결코 호사스러운 욕망이 아니다. 그저 대리만족만을 줄 뿐이며 결국에는 소진과 파멸로만 이끌 뿐인 중독증이 주는 쾌락이 아니라 함께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삶에 대한 기대는 누구에게나 평범한 것이며 동시에 절실한 것이다.  

그러한 삶을 누리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이야기에는 나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함께 그 새로운 삶의 조건과 삶의 양식을 만드는 노력이 없다면 그 기대는 허망할 뿐이다. 나는 자율적인 개인들의 자유로운 결사로서 코뮌을 늘 바란다. 무릇 살아 있는 생명이면 그 어떤 것이든 함부로 대상화하지 않고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세상, 더 나아가 우리가 생명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지만 자연이라는 거대한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세상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나라의 세속적 표현일 수도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그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추구하는 믿음의 실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현실 사회주의는 더 많은 것을 누려야만 체제 보장이 가능하다고 믿어 체제 우위를 입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본주의와 동일하게 생산력 경쟁에 몰입하다 스스로를 소진했다. 물질적 조건이 더 풍부해야 더 낳은 삶이 가능한 것일까? 잘 사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일까? 하나의 반증으로 상호부조의 기풍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서보다는 오히려 결핍된 사회에서 훨씬 더 쉽게 볼 수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사실이 시사하는 바를 우리는 깊게 새겨야 할 것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강요하는 삶의 체제와 삶의 방식을 무력하게 하는 길! 거기에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이 있다. 사실 대량소비 때문에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량생산이 대량소비를 부추길 뿐이다. 그렇다면 그 메커니즘을 무력화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이윤을 남기기 위한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대량생산의 체제를 무력화시키는 것은 대량소비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를 부단히 허덕이게 만드는 체제를 거부하는 길이 거기에 있다. 우리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느냐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소비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결국 대량생산 체제를 작동시키는 그 메커니즘을 무력하게 만드는 대안적 네트워크를 강화함으로써 우리를 허덕이게 만드는 삶의 체제와 방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일을 하는 데 우리는 부지런해야 할까, 아니면 게을러도 될까? 혼자서 또는 소수만이 그 일을 한다면 부지런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럿이 함께 한다면 게으른 것이 그렇게 비효율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050811)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