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등장, 우려되는 가톨릭 교회의 보수화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50
조회
3772
* <뉴스앤조이> 기고문입니다(050421).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등장, 우려되는 가톨릭 교회의 보수화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와 그 장례 절차를 지켜보는 동안 심기가 편치 않았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화해와 용서의 사도'였던 지도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며 장례식장을 향한 세계각국 정치지도자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는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화해와 용서의 사도의 죽음을 안타까워한다는 그들의 애도사는 자신들이 마치 그와 같은 화해와 용서의 일꾼인 양 사람들을 호도하는 것 같았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의 죽음에 화해와 용서와는 역행하는 정치지도자들이 그와 같은 애도사를 말하고, 교회의 권위를 빌리려는 듯 앞다투어 장례식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유감스럽게도 그 지도자가 대표하는 교회가 화해와 용서에 역행하는 정치지도자들과 친구가 되어 있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다음은 장례식을 집전하는 중심 인물의 음험한 이력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을 집전한 인물은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라칭거 추기경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나오는 대심문관을 연상시키는 그는 교황청 교리성성 장관으로서 '가톨리시즘'의 수호를 위해 수많은 '종교재판'을 행해 왔고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한 해방신학을 정죄한 장본인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 재임 기간 동안 '교황의 사람'으로 불리며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 그는 제3세계의 빈곤의 현실을 전혀 눈여겨보지 않고 제도로서 교회의 진리 수호에 몰두해왔다. 그런 그가 혹시 새로운 교황이 되지나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그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베네딕토 16세로 새로운 교황이 되었다. 가톨릭 신자 여부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기대를 했었다. 수적 규모 면에서나 활동력 면에서 이미 유럽 교회보다는 제3세계 교회의 비중이 높아진 가톨릭 교회 현실에서 최초로 비유럽인 교황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소위 '복음의 탈북반구화'(脫北半球化)에 상응하는 선택이라면 그래야 했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가톨릭 교회 내의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통합형 지도자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최악의 경우였다. 유럽중심주의를 고수하는 완고한 보수주의자가 가톨릭 교회를 대표하게 된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보수적인 견해를 견지하면서도 교황청과 견해를 달리하는 가톨릭교인들을 잃는 것에 대해 늘 신경을 쓴 반면, 라칭거 추기경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단호하게 가부를 선택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가톨릭 교회의 혁명적 변화를 불러일으킨 제2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은 이미 요한 바오로 2세부터 퇴조를 했지만, 베네딕트 16세의 등장으로 그 퇴조현상이 더더욱 노골화될 가능성이 농후해진 것 같다.


2.


새로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진보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할 만한 요소는 거의 지니고 있지 않다. 그의 이력에서도 신학적 입장에서도, 젊은 시절 한 때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었던 것 말고는 그러한 면모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10대 시절인 1941년 독일 나치의 청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하였고 2년 뒤에는 항공기 엔진을 만드는 공장의 방공포대에 근무했다. 훗날 가톨릭 신앙이 나치즘에 대한 면역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는데, 그 의중을 알기는 쉽지 않다. 지적인 성향의 라칭거는 1946년에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후 명민한 신학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젊은 신학자 시절 그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었다. 제2 바티칸공의회 기간 동안에는 진보적 신학자 칼 라너가 이끄는 신학자 전위 그룹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훗날 자신이 징계하게 된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의 학생 시절에 스승으로서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튀빙겐 대학에서 가르치던 그는 1960년대말 학생들의 급격한 좌경화 때문에 혼란을 겪게 되고, 동료 교수인 한스 큉과의 대결로도 어려움을 겪으면서 전환을 한다. 큉은 제2바티칸공의회의 개혁을 더욱 밀고 가기를 원했고 그는 주저했다. 이후 교황무오설에 이의를 제기한 한스 큉은 1979년 교리성성의 징계를 받고, 라칭거는 2년 후 교리성성 장관이 되었다.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중세기 종교재판소의 재현인 교리성성의 임무가 현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라칭거는 교리성성을 교황청의 중심으로 세우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그는 제도로서 교회의 권위를 진리와 동일시하는 믿음으로 수많은 종교재판을 행했고,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을 집요하게 공격하였다. 해방신학을 대표하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에 대한 징계는 브라질 교회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1986년 레오나르도 보프에게는 징계를 내림으로써 결국 해방신학을 정죄했다.

교회와 신학이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교회들의 거센 반발로 정죄할 수는 없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에 동참하면서 교회의 구조를 바꾸어나감과 동시에 그 현실을 외면한 교회를 비판한 것은 라칭거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의 통일성, 가톨릭시즘을 위협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현실에서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에 동참하는 것은 곧 정치적 참여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음(그러나 정당정치와는 명백히 다른)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회운동 또는 정치참여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따른 것이었다. 그 어떤 지역 교회보다도 가장 정치적인 성격을 띤 교황청으로서는 교묘한 논리를 펼친 셈이다. 결국 라칭거의 해방신학에 대한 정죄는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 질서에 반하여 다원성을 추구하는 교회에 대한 정죄였다.

그와 같은 입장에서 라칭거는 다른 종교와의 대화, 그리고 개신교 및 다른 기독교 종파와의 대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성사제 서임, 낙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는 터키의 유럽 공동체 가입에도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순수한 유럽 문화의 우월성, 가톨릭 교회의 중심성을 고수하는 그에게는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3.


새로운 교황의 이와 같은 면모를 볼 때, 적어도 교황의 역할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가톨릭 교회는 상당히 보수화할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 세계 현실이 끊임없이 다원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상반되게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의 권위주의화 및 보수화 경향과 어떤 함수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강력한 위계질서 아래 고도로 집중되어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특성상 보수적인 교황은 곧 교회의 보수화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탈권주의화와 다원화를 추구하는 오늘의 세계 현실에서 교회가 아예 등을 돌리는 현상이 가속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는 괜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그리스도의 대리인' 또는 '하나님의 종 가운데 종'이라기보다는 사실상 권력의 상징, 아니 권력의 화신인 교황을 두고 부질없는 기대와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제2 바티칸공의회가 가졌던 교회적 의의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적 의의를 생각한다면 그 기대와 우려는 부질없는 것만은 아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민중들 가운데 함께 하며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교회들이 정당한 몫을 인정받지 못하고, 이 세계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소수자들이 교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세계의 아픔을 의미하며 교회의 손실을 의미한다. 그런 사태를 우려하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자국 출신이 교황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발표 직후 높은 환영도를 나타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교황의 면모가 드러나면서 점차 그 환영도는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우려 때문이다.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개혁 세력은 교회의 보수화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했던 레오나르도 보프는 1992년 결국 사제복을 벗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꽃들과 눈에 띄지 않게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들에 희망을 걸고 있는 그런 이의 하나입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자신의 믿음을 피력한 보프는 그 이전 1986년 바로 라칭거 추기경의 심문을 받고 난 직후 <슈피겔>지와의 인터뷰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교회에 머물고싶습니다. 하지만 로마가 어쩌면 우리들에게 용서를 청할 시점이 올지도 모르지요."

우리의 우려가 그 믿음과 기대로 바뀌었으면 한다. 지금 심히 우려하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형제들에게 환기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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