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빈곤의 일상화와 노동의 위기에 대한 민중신학적 접근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53
조회
3646
신학아카데미 탈/향 2005년도 상반기 강좌

위기의 시대, 위기의 신앙 - 민중신학은 말한다.

넷째 마당 / 2005년 5월 3일(화) 오후 7:30  



빈곤의 일상화와 노동의 위기에 대한 민중신학적 접근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1. 또 다시 빈곤을 말한다.


20여 년 전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전통적 신학의 수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한편의 글을 발표했다. "빈곤의 사회학과 빈민의 신학"(1983.11)이 그것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발표되었던 기왕의 민중신학 단편들이 이른바 '이야기 신학'의 형식으로 새로운 필법을 구사해왔기 때문에 신학의 새로운 서술방법이 그다지 낯설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이 글은 또 다른 면에서 그 형식을 달리했다. 서남동 선생이 즐겨 쓰던 방식으로 민중의 사회전기를 전하는 '이야기'와 함께, 이 글은 사회학적 연구결과에 따른 각종 통계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서남동 선생은 당시 우리 사회의 빈곤의 상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통계화된 여러 지표들을 제시한 후 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덧붙였다. 그리고 맺는 말을 '오픈 엔드'(open end)라는 말로 대신했다. 당시 선생이 그 말을 쓸 때에는 개인적 과제의 차원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빈곤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라는 과제를 장차 본격적으로 다루겠다는 암시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타계하여(1984.7) 후속 연구가 이어질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그 과제는 '오픈 엔드'가 되고 말았다. 선생은 분명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한 후 어떤 후학이 빈곤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게 되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당대의 절실한 과제로서 당신이 씨름할 과제로만 인식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픈 엔드'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강산이 두 번, 아니 한국사회의 변화 속도로 말하면 그보다 몇 번은 더 변했을 이 시점에 우리는 또 다시 빈곤의 문제를 말한다.

내 기억으로도 그 글을 읽을 당시 20여 년 후에 내가 빈곤의 문제로 씨름을 하게 되리라는 상상은 거의 하지 않은 것 같다. 빈곤의 문제가 아예 사라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심각한 사회의 주요 문제로 부각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 탓이었다. 그보다는 다른 문제들이 사회의 중심 의제로 부각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더 길게 말할 것 없이 가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편 그 시대는 희망으로 가득 찬 시대이기도 했다. 민주화의 열망, 사회구조 변혁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열망으로 가득 찬 운동들이 폭발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상황이니 그와 같은 낙관적 기대가 엉뚱한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화를 이루는 것은 정치적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른바 절차적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로 완성된다는 인식이 이미 1980년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실질적 민주주의란 경제적 차원의 평등을 필수 요건으로 한다는 인식이다. 누구나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그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데 경제적인 요인이 장애 조건이 되지 않는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기대를 다들 안고 있었다. 그러한 기대와 함께 이루어진 운동 덕에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이루었다. 1987년 민주화 대투쟁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민주화가 유예되기는 했지만, 이후 민주화의 과정은 대세를 이뤘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오늘 참여정부에 이르는 과정은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랑스러운' 민주화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오늘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행복하지 않다. 기대 욕구가 과도한 탓이 아니다. 절대 다수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어쩌면 민주화 시대 이전보다도 더 가혹한 생활상의 압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일상의 삶을 마치 전쟁 치르듯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면서 미래에 대한 보장이라도 기대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 미래의 보장 또한 매우 불투명하다고 느끼고 있다. 많은 사람이 삶의 불안정성을 느끼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미 경제적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져 사회로부터 배제되어 고통을 겪고 있다. 이들에게 정치적 민주화의 효과는 그다지 실감되지 않는다. 정치적 민주화의 효과로 누리는 것보다는 삶의 불안정성 내지는 경제적 빈곤으로 받는 압박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2. 빈곤의 일상화와 노동의 위기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경제 역시 급성장을 지속하였다. 한국은 드디어 OECD에도 가입하고 국민소득 1만 달러를 구가하는 시대에 돌입하였다. 1997년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경제성장의 추세는 지속되고 있고, 최근 참여정부에 이르러서는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운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체감하는 것은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 2만 달러를 목표로 하는 상황과는 전혀 다르다. 고용의 불안정과 실질적 소득의 하락으로 그런 상황을 체감하기 어렵다. 외환위기 직후만 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태를 다들 일시적 현상으로 생각하였다. 외환위기 당시 국민의 정부는 효과적인 구조조정으로 경기가 활성화되면 더 많은 일자리가 보장되고 생활이 안정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명백히 경기가 활성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외환위기 때보다 지금이 더 살기 어렵다고 말한다. 실제로 최근의 여러 가지 사회적 통계지표들은 단지 주관적 체감 현상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회 현상으로서 경제적 빈곤의 실상을 말해준다.

오늘 우리는 일상화된 빈곤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의 빈곤 현상과는 다른 새로운 빈곤 현상이 만연해 있다. 경제성장의 효과에 힘입어 이미 안정된 사회계층으로서 지위를 누리던 사람들의 상당수가 불안정한 고용과 실직 등으로 절대적 빈곤의 상태에 빠진 경우가 허다하다. 왕성한 노동의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기회를 누리지 못해 빈곤의 상태에 빠진 경우가 있는가 하면, 쉬지 않고 노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내지는 상대적 빈곤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풍요 속의 빈곤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한 10여 년 남짓일까? 특별한 사회보장제 없이 완전한 고용만으로도 경제적 성장의 부가효과를 누렸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지금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과거의 빈곤 현상과 달리 새로운 빈곤 현상은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과거의 빈곤은 노동능력 자체가 취약하거나 노동의 기회로부터 배제된 계층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목격하거나 경험하고 있는 빈곤은 노동능력이 왕성하고 또한 노동의 기회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 계층에서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오늘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신빈곤' 현상은 특정한 계층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있는 사람들 대다수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게 도처에서 쉽사리 목격하고 경험하는 현상이기에 우리는 그 것을 '빈곤의 일상화'로 부르는 것이다.

빈곤의 일상화는 노동의 위기를 말한다. 충분히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빈곤으로 그 노동의 재생산 기반 자체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빈곤의 일상화는 곧 노동의 위기이다. 노동의 위기는 노동시장의 제한된 조건 안에서 말하자면 노동시장의 심각한 분절적 구조와 위계화에서 비롯된다. 최근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쟁점이 되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한마디로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소득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 때문에 제기되는 문제이다. 똑 같이 일하고 있는데도 어떤 사람은 평균이상의 소득과 생활수준을 누리고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평균이하의 형편없는 소득과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와 같은 불균형 내지는 분절적 구조는 대략 몇 가지 분기선을 갖고 있다. 기업규모 곧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 고용형태 곧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 성별 곧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있다. 여기에 하나의 분기선을 더 추가한다면 국적 곧 국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이주 노동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을 감안하면 그 문제를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더 직접적으로 노동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의의를 생각하면 부수적으로 검토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노동시장의 문제를 검토하는데 중요한 하나의 요인으로 다뤄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상과 같이 분절화된 노동시장의 구조와 빈곤의 일상화 현상은 맞물려 있다.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를 제외하면 그 밖의 대다수는 적어도 상대적 빈곤의 현실에 처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정규직이 현재 고용된 노동인구의 과반수가 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 과반수가 삶의 불안정성과 빈곤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하청 중소기업의 고용 노동자들의 현실을 감안하면 빈곤을 체험하는 비율은 더 높아진다. 여기에 전통적인 빈곤층과 실업자의 비율까지 추가하면 더욱 그 폭은 넓어진다.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경기부양 정책의 희생자가 된 400만에 이르는 신용불량자들까지 감안하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진다. 평균적으로 3인 1가구로 추산할 경우 신용불량으로 경제적 압박을 겪는 가계는 1,200만에 달하고, 이는 전국민의 1/3에 해당한다. 빈곤의 상황에 처한 부류의 총합으로 빈곤을 경험하는 이들의 비율을 산정할 수는 없겠지만, 두 가지 이상의 요인이 중복된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그 총합의 경우 비율이 확대되리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여기에 모든 요인이 가중되어 있는 경우라면 그 사태는 말할 수 없이 심각하다.


3. 빈곤의 일상화와 노동의 위기, 그 배경과 파생되는 문제들


한동안 우리는 그와 같은 노동의 위기 상황을 외환위기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이해했다. 물론 보다 더 거시적으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출범과 함께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에 그 근본 요인이 있는 것으로 보았지만, 직접적으로는 외환위기로 급속하게 한국 경제를 재편할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노동시장 재편의 근본 원인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있고 그 재편이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가 외환위기라는 진단은 타당하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명백히 자본의 명실상부한 세계화로서 자본의 경쟁력과 효율성을 최우선시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추세 속에서 낮은 비용으로 높은 효과를 거두기 위한 여러 조치들이 취해졌고, 이른바 '구조조정'은 한국 경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만능 열쇠처럼 통용되었다. 경제의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노동자 감축 및 임금 절감과 동일시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 직후 한국 사회에서는 곧바로 그것이 등식관계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거나 불안정한 고용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의 필연적인 추세는 고부가가치 산업의 비중을 높이고, 이는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 중심의 발전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 경향으로서, 결국 전체 경제 규모의 확대와 국민소득의 증가를 이루어내기는 하지만 고용효과는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를 만들어낸다. 한국 사회는 상당부분 그와 같은 그와 같은 추세 속에 있고, 그러한 추세 역시 높은 실업률을 낳은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흔히 말하는 20:80의 사회로 돌입하는 여러 징후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제어할 수 없는 필연적인 현상일까? 우리가 빈곤의 일상화와 노동의 위기를 신학적으로 접근하겠다는 것은 그와 같은 현상을 빚어내는 하나의 특정한 경제체제 및 질서를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절대화하는 것에 대한 회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을 절대적인 자연적 질서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규정된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빈곤의 일상화와 노동의 위기 현상은 신학적 문제제기 이전에 먼저 검토해야 할 문제들을 안고 있다.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이를 위한 효율성의 강화가 역사적으로 제한된 한계 안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적인 추세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빈곤의 일상화와 노동의 위기를 곧바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심각하게 다뤄야 한다. 최근의 논자들은 우리 사회의 빈곤의 일상화와 노동의 위기 현상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내지는 외환위기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참조. 최장집 편, 『위기의 노동 - 한국 민주주의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2005). 그보다는 오히려 정부의 정책 부재가 실질적이고도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우리 사회는 교묘하게도 경제적 세계화의 과정과 민주화 과정을 동시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세계화'는 문민정부의 국정지표가 되다시피 했다. 외환위기와 함께 등장한 국민의 정부는 역대 그 어떤 정부하에서보다도 경제의 개방화를 대폭 단행했다.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은 역시 이전의 소위 민주화 정부들의 정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앞에서 암시했듯이,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민주 정부들의 경제정책은 성장위주의 정책에서 한 발자욱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 및 제5공화국하에서의 경제기술관료들이 민주정부하에서도 여전히 경제정책을 좌우하고 있는 현실이 드러내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 정책기조가 바뀌지 않은 상황에서 '세계화'와 'IMF'라는 원군을 만나 더욱 득세하는 꼴이다. 정치적 민주화를 진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오히려 경제적으로 퇴보한 일상의 삶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그와 같은 사정 때문이다. 박정희에 대한 퇴행적 향수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는 사회심리적 배경도 그것이다. 박정희 시대와 오늘 민주화 시대의 사회경제적 지표들을 비교해보면 적어도 상대적 빈곤은 지금이 훨씬 심각하다. 박정희 시대 경제적 생활이 사실 하향평준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만큼 불평등의 문제가 덜 심각했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 한국 사회의 불평등 지수는 OECD 국가의 최선두를 달리고 있는 미국보다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또한 미국보다 앞서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적 박탈감, 뿐만 아니라 절대적 빈곤층의 절대적 박탈감이 결코 좋았던 것만은 아닌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하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교훈으로서만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교훈으로서도 유효하다. 흥미롭게도 서구의 복지국가는 모두 경제적 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형성되었다. 잘 알려진 유럽 국가들의 복지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피폐한 상황에서 시작되었으며, 남부유럽 국가들의 복지체제 역시 1970년대의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서구 국가들의 경우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안전망의 구축은 동시적으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서는 그 양자가 병행이 아닌 역행의 관계가 되었다. 높은 정치적 민주화의 욕구와 사회경제적 안전망에 대한 기대가 서로 어긋났다. 사회경제적 안전망의 구축에 이른바 민주 정부들은 무능하였던 것이다. 박정희 시대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경기가 활성화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라는 구호로 변조되었을 뿐, 아무런 변화나 대책이 세워지지 못한 탓이다.  

이로 인한 문제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파생될 수밖에 없다. 이미 앞에서 빈곤의 일상화가 노동 재생산의 위기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것은 순전히 경제적 차원에서 말하면 성장 기반 자체를 와해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실질 소득의 감소로 기본 생활에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충분한 소비생활을 누릴 수 없다. 그래도 이전에 생활하던 방식과 규모가 있기에 카드를 남발하다가는 신용불량자라는 가혹한 낙인을 받는다. 결국 경제성장의 논리로 발생한 노동의 위기는 경제성장 그 자체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부메랑이 될 공산이 크다. 다음으로 노동의 위기와 빈곤의 일상화는 민주주의의 위기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사의 일성이었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겨주었지만 '역시나'로 끝났다. 무차별적 경쟁과 효율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장이 민주주의를 압도하고 있다. 민주 정부들은 꾸준히 정치적 개혁정책을 펼치기 위해 시도하여 왔지만 번번이 난관에 봉착하는 상황이다. 보수세력이 강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지기반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다. 일상의 사회경제적 삶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정당간 권력배분식 제도개혁이나, 역사적 상징적 의제들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정책이 관심을 끌고 있지 못하고 있고 정치 자체가 외면 당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표방하듯이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가능해야 할 텐데, 사람들은 그럴 여력이 없다. 박정희에 대한 퇴행적 향수가 괜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결국 사회경제적 삶의 불안정성이 해소되지 않는 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은 더 이상 진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다음 노동의 위기와 빈곤의 일상화가 빚어내는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사회적 정의에 대한 규준과 공감대를 무너뜨리고 살벌한 생존의 논리만 횡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빈곤의 일상화'에 맞대응하는 '범죄의 일상화'라고 이야기할까? 이혼율의 증가와 그에 따른 가정의 파괴, 그리고 잔혹하고 빈번한 범죄의 증가는 우리 사회가 이미 상당한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다. 최근 공직사회의 높은 도덕성 요구로 우리 사회가 대단히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갖춘 것처럼 착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해당 인사들의 도덕적 불감증도 문제려니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는 공식담론 또한 만연한 윤리적 규준의 와해와 범죄율의 증가를 덮어버리는 알리바이 정도로밖에 역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범죄율의 증가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책입안자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경제성장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다. 사회적 범죄로 인해 치러야 할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4. 빈곤의 일상화와 노동의 위기에 대한 민중신학적 접근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신학은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민중신학은 가난한 사람, 희생당한 사람의 시선에서 사물과 역사('계시의 하부구조': 서남동)를 보는 것이 곧 하늘의 뜻(계시)과 직결된다는 인식에서 형성되었다. 민중신학은 성서 자체를 가난한 자의 신학으로 본다. 서남동 선생의 말대로 '빈민의 신학'이다. 그러니 빈곤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과제 자체가 오히려 새삼스럽다. 그것은 20여 년 전 민중신학자가 말했던 빈곤의 문제를 오늘 다시 말한다는 것보다 훨씬 새삼스럽다. 사람들이 처한 빈곤의 현실을 간과하고서 도대체 신학이 가능할까? 그것을 별도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 과제를 신학의 중심이 아니라 그 일부로 부차화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의 논리에 동화되어 있고, 설교가 생존경쟁의 열의를 부추기는 메시지와 동일시되어 있는 현실이기에 우리는 부득불 빈곤의 문제를 새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예수의 선포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로밖에는 해석될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현실에서는 그런 것 같다. 가난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체험하고 있듯이 고통일 뿐이며, 신학적으로는 징벌일 뿐 아닌가? 믿음으로 복 받고 성공을 한다는 교회의 메시지를 듣고 있으면 그렇게 이해할 도리 밖에 없다. 마치 고통받는 욥을 두고 그의 친구들이 죄의 결과라고 우겼던 것과 같은 논리를 우리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반복해서 듣고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을 보니 너의 잘못이 틀림없다'는 것이 욥의 친구들의 주장이었다. 물질적인 부유함을 누리는 것이 믿음의 결과라는 교회의 상식은 그 주장을 뒤집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욥은 자기 스스로의 잘못이 없이도 얼마든지 고통의 상황의 처할 수 있는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 온몸으로 분투하며 항변한다. 오히려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의 고통은 자기 스스로의 잘잘못과 무관하게 겪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욥은 강조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두고 사람들이 누구의 잘못 때문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는 그의 부모 잘못도 그 본인의 잘못도 아니라고 답했다. 다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려는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요한』 9장). 무슨 이야기일까? 지금 그의 고통에 주목하라는 것이며 그 고통을 겪는 이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라는 이야기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그 고통을 극복하도록 돕는 고통의 연대이며 나아가 사랑의 연대이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은 단지 청빈에 대한 미화일까? 가진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의 결단으로 가진 것을 버리는 일은 아름답다. 그러나 스스로의 선택 여부와 상관없이 주어진 가난은 고통이다. 그와 같은 고통을 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 고통으로부터 헤어 나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은 물질적 충족 내지는 보상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차원을 시사한다. 하느님 나라가 그의 것이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의 주체화 선언이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을 야기하는 현실과 다른 새로운 삶의 차원을 말한다. 그 새로운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 새로운 삶은 나 혼자 경쟁에서 승리하여 가난을 극복하는 삶의 구조와는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 또한 고통의 연대, 사랑의 연대이다. 이것이 가난한 사람, 희생당한 사람의 시선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성서의 '빈민의 신학'의 요체이다.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천상의 독백과 같은 이야기일까? 지금 절실한 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꾸로 천상의 독백처럼 들릴 수도 있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자본의 효율성과 경쟁을 신봉하고 경제성장을 지상의 목표로 아는 이들에게는 한가한 몽상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몽상이 아니다. 실제로 서구의 복지국가 체제는 경제적 위기에 대한 대응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컨대 독일의 경우 "전후 반노동자적 자세로부터 친노동자적 자세로 전환한 기독교의 변신, 이 과정에서 노사화합을 가능케 한 기독교 박애정신, 이를 당의 이념으로 한 기민당의 존재와 같은 역사적ㆍ사회적ㆍ정치적 조건 등, 여러 요소들이 결합하여 가능했다"(최장집 편, 앞의 책, 30-31)는 지적은 새겨볼 만하다. 사회적 안전망의 구축을 가능케 한 서구 기독교의 태도, 또는 그 정신을 이념으로 채택한 당의 정책이 가난한 사람의 주체화를 선언한 예수의 선포와 곧바로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삐 풀린 자본주의 체제의 광폭성을 제어하는 효과를 발휘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무방비 상태로 빈곤의 현실로 내몰리는 현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정책적 제도적 대안 마련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것은 중요한 신학적 과제가 된다.  

또 한편 신학은 빈곤의 현실을 주목하고 그 대안을 마련하는 데 기여해야 할 뿐 아니라, 노동 위기의 상황에서 노동 자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나치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에는 이런 구호가 적혀 있다고 한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매우 시사적이지 않은가? 가혹한 노동으로 자신의 몸을 소진시키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자유를 누렸을 것이다. 자유를 얻었을 때(?)는 더 이상 노동의 능력을 소지하지 않았을 때였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노동의 위기란 결국 그와 같은 극한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상황을 말한다. 쉬지 않고 노동하지만 그 노동이 자유를 보장해주기는커녕 최소한의 삶의 안정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나마 생계비 때문에 노동의 기회마저 상실할까 늘 노심초사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분절화된 노동시장 구조로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노동이 자신을 실현하고 자유를 구가하게 해주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노동은 마지못해 감당하는 굴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래의 노동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노동하지 않은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신화와 함께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는 구호가 계속해서 사람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다. 노동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여기는 노동관 내지는 인간관은 종교개혁가 칼빈에게서 본격적으로 확립되었다. 칼빈에게서 노동은 단순히 인간의 필요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구원의 보증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와 같은 노동관은 사실상 근대적인 노동관의 효시가 되었고 근대 사회를 일관하는 노동관으로 자리를 잡았다(차문석, 『반노동의 유토피아』박종철출판사, 2001. 참조). 이러한 노동관은 모든 인간 개체가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근대적 인간관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런 전제하에서 열심히 일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도 우월한 지위를 인정받는 반면 게으르고 가난한 사람은 도덕적으로도 열등한 존재로 인정된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인간 개체의 자발적 선택 여하에 따라 결정되지 않은 현실이다. 일하기 싫어 실업자가 되고 가난해지는 것이 아닌 현실, 열심히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오늘 현실에서 노동의 선택은 주관적 결단과 의지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또한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노동은 외부적 조건에 의해 철저하게 위계적으로 등급이 매겨지고 있다. 노동과 비노동이 자발적 선택 여하에 따라 결정되지 않을 뿐 아니라 노동 그 자체도 노동시장 안에서 불공정하게 등급 매겨져 있다. 경쟁적 시장체제 아래서 우월한 부문 안에 있는 노동만이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을 뿐 그 밖의 노동은 하찮은 대접을 받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노동을 인간 실현의 고유한 본질로 보는 것이 여전히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 우리는 지금 의문시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노동하는 인간이 스스로를 구현하고 있고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면 어찌 될까?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해 아예 인간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거니와, 그나마 일할 기회를 누리는 사람들은 그나마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만 그렇다고 동등한 인간들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드러내는 하느님의 영광 또한 등급이 매겨진다.

장애를 가진 것이 완전한 무능력을 의미하던 시절, 예수가 태어나면서 눈 먼 사람을 두고 하느님의 일을 드러내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했던 말은 노동관 내지는 인간관을 새롭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다. 그의 사회적 무능이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드러낸다. 그의 사회적 무능은 오히려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내는 단서가 되고 있다. 인간 존재의 의의는 노동의 능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더욱이 시장체제에 포섭된 노동의 등급에 따라 인간의 등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시장체제에 포섭된 노동은 인간 자신을 실현시키기보다는 소진시키고 있다. 현실에서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노동이 그렇게 인간을 소진시키는 굴레의 역할을 한다면 노동의 권유가 더 이상 미덕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의 거부가 미덕이 된다. 파업이 노동자들의 족쇄를 깨트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이 때 노동의 거부는 인간 존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활동을 중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장에 포섭된 노동의 거부를 말한다. 시장에 포섭된 노동에 대한 거부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정당한 노동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가치기준을 확립하는 데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준다. 우리는 예수와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유명한 안식일 논쟁을 잘 알고 있다(『마태』12:1이하; 『마르』2:23이하:『루가』6:1이하). 바리새파 사람들의 공격의 초점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안식일에 예수가 일을 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공격에 대해 사람을 살리는 일, 곧 선한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중단될 수 없다고 응수하였다. 이 논쟁은 노동과 비노동이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을 살리는 노동인가 아닌가 하는 것에 있다. 이 논쟁은 어떤 것이 인간을 살리는 것인가가 우선적인 가치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을 비인간적인 빈곤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는 노동의 위기를 보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가치기준이다(최형묵,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 외국인 노동자와 노숙자 문제에 대한 신학적 성찰,『시대와 민중신학』제6호[200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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