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아니, 저 아이들이 언제 그렇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54
조회
3298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열여덟번째 원고입니다(050505)


아니, 저 아이들이 언제 그렇게...


지난번 장애인주일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특별한 교육활동을 하였다. 장애인부모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박 집사가 아이들에게 장애인식을 위한 특별한 교육을 실시했다. 장애와 관련된 영상과 소품 자료들을 잔뜩 동원하여 흥미진진하게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휠체어를 밀어보는 경험을 하는가 하면, 눈을 감은 채 지팡이를 짚고 걸어보기도 했다. 아이들은 아주 진지했다. 장애 인식을 위해 묻는 말에도 거의 틀림없이 적절한 답들이 톡톡 튀어나왔다. 아이들이 대견스러웠고,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두 가지 대목에서 적이 놀라고 말았다. 기대했던 것과 다른 답이 튀어나온 대목에서였다.

박 집사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 인형을 가지고 장애를 가진 그 아이에게 뭐가 필요한지를 물었다. 튀어나온 답은 '사랑'이었다. 얼마나 명쾌한 답인가! 그러나 나는 순간 '아니, 언제 아이들이 저렇게 교리교육에 물들었지? 우리 교회가 교리를 주입하는 식의 교육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구체적인 상황을 헤아리고 나름대로 적합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의중에서 나온 것이라면 몰라도 교회의 상투적인 언어가 모르는 순간 뇌리에 박혀 있다가 튀어나온 것이라면 명답이라고 박수칠 일은 아닌 듯했다. 그 경우 적절한 답은 그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인 '도움'이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어찌 보면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 어린이들이 교회의 상투적인 언어를 먼저 익히면서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 순간적으로 우려되는 대목이었다.

속으로 정말 놀란 대목이 또 하나 있었다. 박 집사가 가져온 장애인 인형들은 흑인 황인 백인 골고루였다. 흑인 아이 인형을 들고 박 집사는 "예쁘지요?"라고 힘주어 물었지만 대답은 시큰둥했다. 우리와 똑같은 황인 아이 인형을 들고 물었을 때도 비슷했다. 그런데 백인 아이 인형을 들고 물었을 때는 목소리가 달랐다. 의심의 여지없이 예쁘다는 반응이었다. '거 참, 언제 아이들이 저렇게 또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또 걱정스러웠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인종적 편견을 정당화하는 의도적인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생활 환경에서 체득하고 만 편견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 텔레비전, 책 등 모든 매체를 통해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아름다운 백인을 연상하게 된 것이다.

모르는 사이 인종적 편견을 비롯 각종 편견을 조장하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일주일에 한 시간 특별한 체험을 한다고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조금 아득해졌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이나마 그 특별한 기회마저 없다면 또 어찌 될 것인가? 상투적인 언어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언어로 '우리는 모두 한 형제'라고 말할 수 있는 아이들을 길러내는 교회교육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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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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