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흔들리는 교회, 흔들리는 신학: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지 못하는 교회와 신학의 무용성에 대하여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56
조회
5057
신학아카데미 탈/향 2005년도 상반기 강좌

위기의 시대, 위기의 신앙 - 민중신학은 말한다.

다섯째 마당 / 2005년 5월 10일(화) 오후 7:30  



흔들리는 교회, 흔들리는 신학:

시대의 아픔에 함께 하지 못하는 교회와 신학의 무용성에 대하여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운영위원)



1. 에피소드


지난 장애인주일에 우리 교회 어린이부에서는 장애인식을 위한 특별 교육활동이 있었다. 충남장애인부모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교우가 영상 자료와 여러 가지 소품들을 준비해 와 성심껏 교육을 진행했다. 아이들은 휠체어를 밀어보는 체험을 하는가 하면 눈을 감은 채 지팡이를 짚고 걸어보기도 했다. 아이들은 아주 진지했다. 장애 인식을 위해 묻는 말에도 거의 틀림없이 적절한 답들을 톡톡 내놓았다. 아이들이 특별한 체험을 함으로써 장애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극복하게 된 아주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를 놀라게 한 대목이 있었다. 기대했던 답과 다른 답이 나온 대목이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 인형을 두고 장애를 가진 그 아이에게 뭐가 필요한지를 묻는 대목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사랑'이었다. 얼마나 명쾌한 답인가! 그러나 나는 순간 '아니, 언제 아이들이 저렇게 세뇌되었지? 우리 교회가 교리문답식의 교육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구체적인 상황을 헤아리고 나름대로 적합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의중에서 나온 것이라면 몰라도 교회의 상투적인 언어가 모르는 순간 뇌리에 박혀 있다가 튀어나온 것이라면 명답이라고 박수칠 일은 아닌 듯했다. 그 경우 적절한 답은 그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인 '도움'이었어야 했다. 어찌 보면 심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혹시 어린이들이 교회의 상투적인 언어를 먼저 익히면서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싶어 순간적으로 우려가 앞섰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것은 교회의 제도와 관습,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언어가 부지불식간에 교인들의 사고방식을 규정하고 결국에는 진실에 접근하는 감수성을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말이 마치 교회의 전용어처럼 되어 있지만, 정작 그것이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과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되기보다는 교회만의 상투적인 형식으로 맴돌게 만드는 어떤 폐쇄회로가 있지 않을까? 교회의 제도 및 관습과 공식적인 신학이 그 폐쇄회로를 강화하는 공모관계에 있지 않을까? 그 사랑이 추상적인 언어로, 또는 자기만족적인 어떤 심성과 언어로만 머물러 있게 만드는 모종의 메커니즘이 작동되고 있지 않을까? 바로 그런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2. 폐쇄회로에 갇힌 신학


그 폐쇄회로에 갇혀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동시에 강화하고 있는 신학의 한 전형을 우리는 성서의 욥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욥과 그 고통을 위로해주고 어떤 대안을 찾고자 나선 친구들과의 격렬한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는 욥기는 오늘 교회와 신학의 위기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욥은 갑작스럽게 고통의 상황에 처한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몸마저 병든 신세가 된다. 삶 자체가 고통일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 욥은 탄식한다. 차라리 죽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 될 것이라고 절규한다. 그렇게 고통을 겪는 욥을 두고 친구들은 저마다 진지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완숙한 경륜을 자랑하는 엘리바스, 교리적 지식으로 무장한 빌닷, 직설적인 소발 등 세 친구는 욥이 고통의 상황에서 헤어 나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저마다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친구들의 이야기는 모두 한결같다. 지금 욥이 고통을 겪는 것은 죄로 인한 하느님의 징벌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복을 받지만 불의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인과응보의 논리다. 결국 그 징벌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일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그와 같은 충고에 거세게 저항한다. 친구들의 충고는 충고가 아니며 절대로 위로가 되지 못한다고 항변한다. 친구들의 말대로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친구들의 이야기가 백 번 지당한 이야기이겠지만 그 이야기들은 자신의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의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친구들의 빈말 때문에 분노한다. 친구들의 주장은 그 진지성에도 불구하고 욥이 처한 상황에서는 빗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친구들의 위로와 충고는 자신을 더욱 번뇌케 만들 뿐이며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 친구들의 무정함을 한탄하는 욥은 나아가 그 친구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과연 정당한지 의혹을 제기한다. 아예 하느님을 향해 항변한다. 하느님의 뜻이 과연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해명이 되느냐고 항변한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무고하게 숨지고 고통을 받는 많은 사람들의 처지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친구들을 향한 항변이며 동시에 하느님을 향한 항변으로 욥은 그렇게 외친다. 친구들이 말하는 주장이 일면 어떤 진실을 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욥이 경험하는 상황은 그와 같은 친구들의 주장으로 결코 해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욥이 경험하고 있는 상황은 거꾸로 악한 사람들이 잘 되고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을 겪는다. 욥이 경험하는 하느님은 "흠이 없는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모두 한 가지로 심판하신다"(『욥기』9:22). 아예 하느님은 시비를 가리지 못하게 가로막기조차 한다. 하느님이 확고부동하게 인과응보의 논리 속에 있다면 도대체 그런 사태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지 욥은 일관되게 이의를 제기한다.  

소위 '경건한 지혜'와 '불경한 지혜'로 대별될 수 있는 친구들과 욥의 대결은 두 개의 신관, 두 개의 세계관의 대립을 의미한다. 확신에 차 있지만 결코 구체적인 고통의 현실에 다가서지 못한 세계관과, 의혹으로 가득 차 있지만 고통의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세계관이다. 이 대립은 곧 두 세계의 대립을 의미한다. 흠이 없고 경건한 사람들의 세계와 흠이 많고 불경스러운 사람들의 세계다. 흠이 없고 경건한 사람들의 세계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들, 복을 받은 사람들의 세계다. 그들이 고통을 겪지 않고, 따라서 복을 받았다는 사실로 그들의 흠 없고 경건함이 정당화되는 세계다. 흠이 많고 불경스러운 사람들의 세계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 벌을 받은 사람들의 세계다. 그들이 고통을 겪고, 따라서 벌을 받았다는 사실로 그들의 흠 있고 불경함이 정당화되는 세계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라 한 세계의 다른 두 모습이다. 현실에서 부유하고 건강한 사람이 옳다고 인정되기 때문에 가난하고 질병에 걸린 사람이 잘못된 것으로 인정되는 세계의 모습이다. 그런 세계 현실에서 친구들은 자신들의 유복함 때문에 자기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대변한다면, 욥은 박복함 때문에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그 세계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대변한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과 그 신학, 스스로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진실을 해명하는 출발점으로 삼는 사람들과 그 신학의 대비이다.

이와 같은 대비는 사실 현실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레퍼토리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두고 던진 제자들의 물음과 예수의 태도, 그리고 이어지는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대결(『요한』9장) 또한 그와 같은 대비를 보여준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대의 지배적인 세계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은 그 사람이 눈 먼 사연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를 묻는다. 예수는 그의 부모의 잘못 때문도 본인의 잘못 때문도 아니며, 다만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려는 것일 뿐이라고 답한다. 질문을 던진 제자들은 눈 먼 사람의 고통에서 세계 현실의 정당성을 찾으려고 한다. 물론 그 물음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태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이 그 세계를 정당화하는 하느님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의도까지 포함되어 있다. 반면에 예수는 눈 먼 사람의 고통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찾고 있으며 전혀 다른 하나님을 찾아낸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 그 고통을 극복하고 당당한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세계,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하느님이다. 눈 먼 사람에 대한 예수의 언행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눈을 뜨라는 촉구이기도 하다. 눈뜨고도 눈먼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에 사로잡힌 세계에서 정당화된 주체들 대신에 새로운 주체를 역설한 바울의 신학 또한 그와 같은 상황을 말해준다. 바울은 유대인도 아니오 그리스인도 아니며, 나아가서는 로마의 시민도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주체를 강조한다. 바울은 타인의 희생과 고통 위에 선 폐쇄적인 세계의 자기의 대신에 바로 그로 인해 고통을 겪고 희생당한 이들의 표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세움으로써 새로운 인간, 새로운 세계를 말한다.

오늘의 현실에서는 어떨까? 오늘 우리의 현실과 교회에서도 그와 같은 대립은 지속되고 있다. 하나의 실마리로 예컨대 칼빈의 예정론과 노동에 대한 이해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본래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영광의 수단으로서 노동에 대한 이해와 결합하여 또 하나의 자족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구원의 선택을 받았다는 예정을 도대체 확인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결국 근면한 노동으로 현실의 복을 누리게 된 사실로 입증되지 않은가? 물론 뜨거운 확신 그 자체로도 구원의 선택이라는 예정을 굳게 믿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유포되는 신학은 확실히 현실에서 복 받은 자의 자기의를 정당화하는 신학이다. 믿음이 좋아 복 받는다는 이야기는 가장 명료한 그 통속적 형태이다. 그러한 신학이 유포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믿음 그 자체가 부족하거나, 게으르거나, 아니면 뭔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러므로 항상 엎드려 회개하여야 한다. 그렇게 교회에서 엎드려 회개하는 사람이 많은데도 현실은 어째서 변하지 않는 것일까? 무고하게 희생당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현실에 눈을 돌리게 하기보다는, 그 희생과 고통이 사필귀정, 인과응보에 해당한다고 강변하는 신학만이 진정한 신학으로 인정받는 교회 현실 때문이다. 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불경이요 그에 순종하는 것만이 경건으로 인정받는 교회 현실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와 신학은 그렇게 고통을 자기 나름으로 전유함으로써 고통의 현실 자체에 대해 사실상 둔감하게 만든다.


3. 고통의 현실에 둔감하게 만드는 교회


고통의 현실에 직접 다가가 그 대안을 찾도록 하기보다는 그 대안을 다른 방식으로 치환시키도록 하는 신학은 사실 그 치환의 효과를 강화시켜주는 교회의 구조 및 성격과 맞물려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고통스러운 현실과의 대결을 무디게 만드는 신학은 교회에 대한 헌신 그 자체가 고통을 극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믿게 만드는 교회의 구조 및 성격에서 비롯된다. 그 신학은 항상 단순하고 명쾌하지만 그 신학을 떠받쳐 주고 있는 교회는 여러 가지 은폐 엄폐의 베일 속에 가려져 있는 모습이다. 그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 신학의 위기를 부르는 교회의 위기 진상은 어떤 것일까?

사실 제도로서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교회 그 자체를 위기구조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제도로서의 교회의 출발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존립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대응으로 형성된 제도로서의 교회는 그 자체가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고통을 사실상 망각하게 함으로써 신앙 그 자체의 위기를 가져 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현실에서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존립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교회의 등장을 확고부동한 대안으로 보는 견해와 교회의 존재 그 자체를 위기로 보는 견해가 늘 평행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교회의 존재 그 자체를 위기구조로 보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을 때 그나마 신앙의 원 자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오늘의 교회를 바라본다.

역사상 존재한 제도로서 교회 모두가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겠지만,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힘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봉건 사회 말기 기독교를 수용한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근대화된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사실상 동일시하였다. 기독교 수용을 서구적 근대화와 동일시하며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길로 인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가진 힘을 실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 또한 가지고 있다. 예컨대 선교사들의 후견 덕분에 교회는 탐관오리들의 학정을 피하는 도피처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특별히 미군정기와 한국전쟁 기간중에는 교회가 미국의 원조물자를 배분하는 창구 역할까지 하였다. 그 까닭에 한국 기독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심리적 실질적 의존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교회가 피난처가 되고 자원의 배분 창구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측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별다른 여과 과정 없이 곧바로 신앙 그 자체에 대한 보상으로 동일시된 점이 문제였다. 과거 교회에서 성탄절이나 그 밖의 교회의 명절 때 맛있는 것을 잔뜩 안겨 줌으로써 아이들을 교회로 이끌었던 전도방식, 최근 교회에서 많이 행해지는 '달란트 시장'과 같은 가시적 보상 행위 역시 그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어쨌든 그와 같은 가시적인 보상 기제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교회는 그것을 정말 신앙의 차원으로 승격하여 체질화한 셈이다. 그러한 체질을 갖춘 교회는 경제성장 정책이 본격화되던 시절 경제성장 정책의 효과를 가장 적극적으로 누렸다. 여기에서 경제적 근대화는 곧 신앙의 성취로 인식되었다. 한국교회의 공세적인 성장 전략은 공세적인 경제성장 전략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더욱이 미국을 비롯 근대화를 이룬 서구 국가들이 잘 사는 이유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고 못사는 나라들은 비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는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경제적 성장과 교회의 양적 성장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양면관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 자본주의 삶의 양식이 지니는 양극의 모순을 익히 경험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는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내달리지만, 그 욕망 충족의 한계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배제 당한다. 근대화와 신앙의 성취를 동일시한 한국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의 양식을 용인할 뿐 아니라 스스로 체현하고 있다. 성공신화가 신앙의 언어로 포장되어 교회 안에서 '복음'이 되고 있다. 그렇게 성공의 정도가 곧 믿음의 정도로 평가되는 교회의 풍토에서 성공하지 못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사실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다수는 무차별적인 경쟁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일 텐데, 그들이 교회 안에서 버틸 뿐 아니라 나아가 헌신적인 '성도'가 되는 이유는 성공신화에 대한 믿음을 곧 믿음 그 자체로 치환시키는 교회의 구조와 신학 탓이다.

고도 경제성장기에 한국사회는 실제로 많은 병폐를 안고 있었다.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 그리고 전통적인 공동체적 유대의 파괴 등의 문제였다. 이 가운데 정치적 억압이 완화된 것 말고 나머지는 여전히 지금도 우리 사회의 문제로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요인은 한국 교회의 성장을 가속화시킨 요인이었다. 그로 인해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심리적인 안정기제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경제적 고도성장기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 대안적인 기능을 담당한 셈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기능은 한국교회의 공세적인 성장 전략의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그 병폐에 편승해 단순히 심리적 안정 기제를 마련해 준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심리적 안정 기제를 제공한 것은 결국 공세적 성장 전략의 하위 단위로서 몫을 한 것이다. 교회는 그 병폐로 겪어야 하는 고통 그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그 고통을 견디며 다시 생존경쟁의 전의를 불태울 수 있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한 셈인데,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교인이 되는 길을 통해서였다. 역사적으로 한 때 자원배분의 배타적 창구 역할을 했던 교회는 이제 사실상 은혜의 독점적 창구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헌신하고 그 안에서 엎드려 회개함으로써 그 은혜를 누리기를 경쟁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제를 통해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는 '죄인'이지만 교회 밖을 나서면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죄인들과 구별되는 '의인'이 되는 의식의 전도를 경험한다. 그러니까 고통을 야기하는 현실, 따라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 그 자체는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의식 가운데서는 그 고통은 저 밖의 죄인들의 문제일 뿐인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편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고통의 체감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다. 그 고통의 체감을 덜어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고통의 느낌을 지우기 위한 노력은 죄의식을 지우기 위한 노력의 과정과 일치한다. 교회는 죄인이었던 사람들의 점진적인 성화를 가시적으로 보증해주는 여러 기제들을 갖고 있다. 입문과정에서부터 차츰차츰 올라가는 직분의 상승 절차는 그와 같은 기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개신교 교회들에서는 만인사제직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됨의 개념 등이 번번하게 교회의 공식 담론상으로 통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교회를 움직이는 실질적인 원리는 명백하게 직분의 위계질서이다. 사실상 직분 서열에 따른 역할상 비중의 차이를 대부분의 교회법은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교회 직분은 교회생활의 연한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사회적 신분과 병행을 이룬다. 대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교회에서도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 등식관계는 모범적인 선망의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제시해준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그 길까지 분명하게 제시해준다. 믿음이 좋으면 세상에서도 복 받는다. 교인들은 그 원리를 확실하게 인지한다. 사실상 교회에 대한 충성을 믿음의 신실함으로 인식하고 스스로 충성스러운 '교인'이 되기를 노력한다. 충성스러운 교인이 되면서 교회가 온존시키고 있는 세계관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교회만의 폐쇄회로에 들어가 그 질서와 세계관에 별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순종의 미덕을 지켜간다. 그 교회의 세계 안에 있을 때는 딴 사람이 된다. 그러나 밖에 나오면 고통스러운 현실은 그대로다. 그래서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다시 교회로 향한다. 고통을 안고 나아가는 교회가 아니라 고통과 거리를 유지한 채 병존하는 교회로 인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4. 타자를 향한 개방성으로서 신앙, 그리고 교회      


제목을 "흔들리는 교회, 흔들리는 신학"으로 했지만, 사실은 "흔들리지 않는 교회, 흔들리지 않는 신학"이라 하는 것이 마땅할지 모르겠다. 고통의 현실에 개입해 들어가 그 현실을 변화시키는 교회와 신학이 아니라, 자족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밖으로부터의 이의제기를 허용하지 않은 채 요지부동한 교회와 신학이 우리의 시대를 풍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들리는 교회, 흔들리는 신학"이라는 제목은, 그와 같이 요지부동한 교회와 신학이 이의제기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확고함이 무너져야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된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신앙은 타자를 향한 개방성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성서의 요체는 예수도 집약하고 있듯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하느님에 대한 관심,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관심,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체화된다는 이야기이다. 성서의 황금률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마태』 7:12) 예수는 바로 이것이 율법서와 예언서의 본뜻이라고 말한다.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이 우리가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의 요체라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그와 같은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오늘 자기만족의 폐쇄회로에 갇힌 교회와 신학을 보면서 우리는 그 초보적 원리를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초보적 원리가 교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의 존립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교회가 정착된 구조라는 입장에서는 교회 자체가 이미 '구원의 방주'이기에 교회 밖의 타자들은 언제나 객체로 머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언제나 구원의 대상, 더 정확히 말해 전도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이 회개하여 구원의 방주에 오르는 것만이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이 된다. 그리고 고통의 현실은 언제나 그대로 세상에 남아 있다. 반면에 교회 자체가 위기구조라는 입장에서 보면 교회는 언제나 타자의 고통 때문에 동요할 수밖에 없다. 교회 스스로가 존립을 위한 제도 내지 조직으로서의 불가피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오 신앙을 구현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면 교회는 마땅히 교회 밖의 타자들의 고통을 남의 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결국 현실의 교회를 위기구조로 인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은 교회에 대한 견해의 차이일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의 교회들의 대별을 의미할 수도 있다.

교회의 해체를 지향해야 할 것인지, 교회의 재구성을 지향해야 할 것인지 하는 문제도 그와 관련되어 있다. 흔들리지 않는 교회를 유념한 것이라면 해체를 지향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확고한 제도로서 교회가 타자에 대한 개방성, 세계와의 소통성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다면 그 교회는 존재 의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교회를 정당화하는 신학 역시 해체되어야 마땅하다. 이 경우 그리스도인은 탈교회적 주체로 설정하여야 할 것이다. 반면에 타자의 고통 앞에 민감한 교회가 가능하다고 보면 교회의 재구성을 지향하는 것은 하나의 유용한 방안이다. 실제로 교회가 가장 유력한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에 해당하는 점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방안의 현실적 의의는 크다고 할 것이다. 이 경우 그리스도인은 교회적 주체와 탈교회적 주체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되겠지만, 그 갈등은 소거되어야 할 갈등이라기보다는 타자의 고통에 더욱 민감한 교회를 만드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다. 그 갈등을 통해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는 교회와는 다른 교회의 재구성이 가능하게 된다. 최근 우리가 '대안교회'라 말하는 교회들은 그와 같은 교회의 재구성 시도의 맥락에서 평가할 만하다. 그러한 교회들은 교회가 가진 인적ㆍ물적 자원을 교회 밖의 세계를 위해 선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일찍이 민중신학은 스스로 위기의식을 갖는 교회들에 대해 말해 왔다. 안병무 선생은 오늘의 교회가 '종말의식'을 상실했다고 지적하면서 예수 사건 또는 민중사건에 동참하는 공동체로서 교회의 성격을 강조하였다. 서남동 선생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건으로 발생하고 일어날 때 일어나고 꺼질 때 꺼지며 보이는 형태가 없고 자발적으로 명멸하는 새로운 교회를 '성령의 교회' '민중의 교회'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이해는 사실상 지배체제와 동일시된 제도로서의 교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함축하는 것인 동시에 교회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시사한다. 한편으로 교회의 해체를 지향하며, 또 한편으로 새로운 교회의 재구성을 지향하는 노력은 그와 같은 민중신학의 성과를 공유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특정한 신학의 사조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민중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교회의 몫을 찾아야 한다는 당대적 요청에 대한 진지한 노력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민중신학의 성과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는 것은 오늘 당대의 상황에서 민중신학의 의의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번 강의 주제와 관련된 글들>
최형묵, "욕망과 배제의 구조로서 기독교적 가치", 『당대비평』, 2001.봄.
-----, "한국 기독교, 희망은 있는가?", 『봉림문화』(창원대), 2002.가을.
-----, "자본에 묶인 교회에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기", 『사람됨의 신학』(감신대), 2003.여름.
-----, "신학의 위기와 한신의 신학", 『세계와 선교』(한신대), 2003.12.
-----, "참 교회됨의 신학적 이해", 『교회와 세계』(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2004.1/2.

-----, (같은 제목의 요약문), 『공동선』, 2004.3/4.
-----, "한국교회,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월간목회』, 2004.5.
-----, "위계적인 교회의 신앙문화", 『시대와 민중신학』, 2004.

* 모두 천안살림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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