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다면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36
조회
3350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열두번째입니다(050120).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다면


내가 사는 곳 아우내 장터에 가면 낯익은 한 얼굴을 볼 수 있다. 성도 이름도 모르지만 아우내에서 그의 존재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나이도 꽤 지긋하고 겉으로 보기에 비교적 멀끔하게 생겼는데, 속칭 '좀 모자란' 사람이다. 그러나 아우내 사람들은 그를 전혀 '모자란'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는 아우내에서 확실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다. 평소 상가나 잔칫집에서 온갖 궂은 일을 다 맡아 할 뿐 아니라, 장날이면 장터에 나와 여기저기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한다. 그리고 식사 때가 되면 일을 도운 집에서 식사를 하고, 저녁때가 되면 가게집 앞이나 포장마차에서 한 잔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가 대도시 한복판에서 살고 있다면 어떨까? 틀림없이 천덕꾸러기일 것이다. 그야말로 빌어먹는 신세로 살아야 할 것이고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박대를 당할 것이다. 남루한 노숙자의 신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농촌의 작은 지역사회에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그렇게 누추하지도 않고, 사람들도 그를 불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고맙게 여긴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필요로 하고, 아마 스스로도 존재감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도시 사람들은 마음이 강퍅한 탓이고, 시골 사람들은 마음이 착한 탓일까? 눈꼽만큼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탓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도시 사람들이 타자를 위한 배려에서 훨씬 세련된 반면 시골 사람들이 더 막무가내인 경우도 흔하지 않은가. 도시 사람과 시골 사람의 심성 차이에 따라, 그 사람의 존재 의미가 달라진다기보다는 삶의 관계, 삶의 양식의 차이에 따라 그 사람의 존재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다. 어떤 삶의 관계에서는 잉여인간이 있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삶의 관계에서는 남아도는 인간이 없이 서로 얽혀 있다.

욥기를 주제로 성경공부를 하다가 퍼뜩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떤 사람은 서남아시아의 지진해일 사태를 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 간단히 선언해버리고 또 그 청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는데, 우리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재난으로 우리에게 더 시급하게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난의 연대, 사랑의 연대라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도대체 내가 알지 못하는 지구 저편 사람들의 아픔을 어떻게 체감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면 되는 것일까?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마음먹는 데 특별한 수고도 비용도 들지 않으니 마음먹은 대로 척척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기가 쉽지 않으니 문제다. 결국 타인의 고난 앞에 연민이이나 안타까움을 표하는 것보다, 그 재난을 면한 나의 정당성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버리도록 만든 삶의 관계, 삶의 양식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목사는 그렇게 명쾌하게(?) 답을 내려주었건만, "재난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그 아픔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말해놓고도 그 말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고 느끼는 목사의 마음은 참 무겁기 그지없다. 교회는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곳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관계를 익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을 다시 한번 깊이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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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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