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불온한 상상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29
조회
3426
* <주간 기독교> 목회단상 아홉번째입니다. (041108)


불온한 상상


얼마 전 호주연합교회 손님을 맞은 적이 있다. 지역의 교회들을 탐방하던 중 한 교회당에 걸린 '선한 목자상'을 보고 묻는다. 한국교회에서 자주 보는 풍경인데, 그 그림을 그렇게 내거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느냐고 했다. 동행한 목사들은 다들 웃으면서 "그냥 좋아서!"라고 답했다. 엉뚱한 질문 같았지만, 생각해 볼 거리였다. 푸른 초장에 양떼들이 풀을 뜯고 그 한 편에 어린양을 안고 서 있는 어지신 목자 예수상을 바라볼 때 아마도 누구나 평안함을 맛볼 것이다. 달리 이유가 있겠는가! 그 목자 품에서 평안함을 맛보고 싶은 기대 때문에 다들 그 그림을 좋아할 것이다. 삶에 지친 이들의 당연한 기대이다.

못된 버릇일까? 그 물음에 대한 해답 찾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이 한국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면, 혹시 또 다른 의미에서 한국교회 신앙의 어떤 내면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 내 불온한 상상은 이렇다. '보살피는 목자'와 '말없이 순종하는 양떼', 이렇게 대별해 보면 퍼뜩 한국교회의 한 실상이 곧바로 연상되지 않은가! 사실상 거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요구받는 목회자와 말없이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아는 평신도의 관계 말이다. 그렇게 '정해진' 역할을 감당하면 교회가 평안하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는 교회 현실이다. 혹시 그 그림이 그러한 위계관계를 내면화하는 기제 가운데 하나로 작동하지는 않을까? 나는 그 그림을 내거는 이들의 선의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에서 성상 논쟁이 가지는 의미나 종교개혁가들이 일체의 성상을 배제했던 뜻을 생각하면 내 불온한 상상은 허튼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와 같은 상상에 연이어 나는 우리 교회당을 둘러보았다. 우리 교회당에도 걸어놓은 그림이 한 점 있다. 파피루스에 그려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모사품이다. 애초 그 그림을 내건 것은 재질의 특이성 때문이었지만, 걸린 그림으로서 효과는 재질보다는 그 내용 자체가 주는 의미에 있을 것이다. 나는 그 그림이 성찬을 자주 나누고, 함께 나누는 밥상의 의미를 중요시하는 우리 교회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교회당에서 눈에 들어 들어오는 것은 그보다는 전혀 엉뚱한 포스터 한 장이다. "NO", 새까만 바탕에 하얀 색으로 그렇게, 그리고 그에 비해 자그마한 빨간 글씨로 "war"라고 써 있는 반전 포스터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한 시점에 한 반전평화단체가 만든 포스터인데, 그 때 그것을 내걸 때만 해도 그저 한시적으로 내걸 생각이었다.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행하게도 전쟁은 터지고 말았고, 아직도 전쟁 아닌 그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그 사이 교회당을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포스터를 다시 걸어두고 있다.

지겨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포스터는 우리 교회당에 걸려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것도 모를 일이다. "예"라고 답해야 할 것보다 여전히 "아니오"라고 답해야 할 것이 많은 현실이 지속된다면 그 포스터는 더 많은 시간 동안 그 존재의의를 지니게 될지도 모른다. "예!", 그렇게 큼지막한 글씨가 써 있는 그림이 걸릴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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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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