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07
조회
3943
2004년 대전노회 북부시찰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주제강연

2004.6.25(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주제설정의 취지


지난 해 희년을 맞이했던 우리 교단은 제2의 출발을 위한 다짐의 의미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시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정체성을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이 물음은 교단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물음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물음의 의미는 실로 막중하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세상의 정체성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성경학교는 자라나는 세대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자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의, 나아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 의의를 깨닫도록 돕기 위하여 이 주제를 채택한 것이다.          


2. 정체성에 대한 물음, 존재의 확인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름을 묻는 것은 존재에 대한 확인을 의미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관습이나 통념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전통에서도 이름은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성서에서도 역시 이름은 존재 자체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존재의 탄생은 항상 새로운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사울이 바울로 바뀐 경우가 전형적인 경우다. 이름이 존재를 나타나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던 사실에서도 분명하다. 성서 전승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죽는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일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성서에서 그 이름이 등장하면 '주님', 또는 '주 하나님'으로 바꿔 불렀다. 이름이 존재 그 자체를 나타낸다고 보는 전통이다.

대개 이름이 바뀌는 경우는 과거의 존재를 부정하고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을 의미한다. 한 부족의 조상 아브람은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국수주의적 율법주의자 사울은 보편주의적 그리스도인 바울로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과거의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은, 삶의 극적인 전환, 곧 전향이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의 전환', 이것은 어떤 경우일까? 흔히 아브라함이나 바울의 경우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 '과거 존재의 부정, 새로운 존재의 탄생'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야곱의 경우는, 경우가 다르다. 단순한 전환, 전향이 아니다. 물론 새로운 이름을 얻음으로써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야곱의 경우에 아브라함이나 바울의 경우와 명백히 다른 점이 있다. 아브라함이나 바울의 경우에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면서 이전의 이름은 잊혀진다. 반면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지만, 여전히 야곱으로 불리고 기억되고 있다. 그 이름이 부정당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 것이 아니라, 야곱이 곧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말한다. 야곱이라는 존재가 부정당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야곱이라는 존재가 이스라엘이라는 존재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새롭게 이스라엘로 불리게 된 야곱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3. '둘째'의 이름, 야곱


야곱은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었다. '첫째'가 아니라, '둘째'였다. 쌍둥이라고는 하지만, 단 1초만 늦게 나와도 아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결정된 운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맏아들을 중심으로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는 가족관계, 사회관계 안에서 그것은 결정적 차이를 나타낸다. '맏아들'은 '기득권'을 의미한다면, '둘째'는 '상실'을 의미한다. 맏아들은 어떤 경우에나 당연하게 우선시 된다. 그러나 둘째는 저절로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다. 스스로 피나는 요구와 주장을 펼쳐야 하고 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 야곱과 에서 이야기에서, 야곱이 취하는 행동방식은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곱은 둘째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그 성격 면에서도 에서와는 대조를 이룬다.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 되어 들에서 살고, 야곱은 성격이 차분한 사람이 되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다. 또한 형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아우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다. 이 대비는 남성과 여성의 대비를 의미하기도 한다. 형 에서는 근육질의 남성적 힘을 상징한다면 아우 야곱은 연약한 여성의 섬세함을 상징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 그것 역시 첫째와 둘째와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오늘날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심각한데 고대 사회에서는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남미 어느 나라에서 하루를 '금남의 날'로 정하고 그날 밤에는 일체 어떤 남자든 길거리에 나서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날 밤거리는 '여성들의 해방구'가 되어 축제의 마당이 벌여졌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거꾸로 '금녀의 날'을 정해 역시 일체의 여자들을 길거리에 나서지 못하게 했다. 그 날 밤은 그야말로 '썰렁한' 거리에 찬바람만 휑하니 날렸다고 한다. 여자 없는 거리에 남자들이 나갈리 없다. 이 사실은, 현존하는 남성 위주의 사회질서와 그에 맞추어진 일상생활이 남자들에게는 훨씬 좋은 반면, 여자들에게는 마땅치 않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니까 여자들은 그 일상을 탈출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 소위 '비정상적인' 기회를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으로 대변되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그러한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남성'은 '기득권'을 나타냄과 동시에 소위 말하는 '정상의 질서' '정상의 방법'을 나타내는 반면, '여성'은 '상실'을 나타냄과 동시에 소위 '정상 사회'로부터의 '일탈'을 나타낸다.

'발뒤꿈치를 붙잡고 매달릴' 수밖에 없고, 정상적인 안목에서는 '속이는 짓'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여기에 있다. 그 이후의 야곱의 행동은 계속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형 에서는 정주한 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야곱은 그 고향을 벗어나 객지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탈'이요, '탈주'다. 객지의 외삼촌 집에서도 비슷한 상황은 계속된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 야곱은 라반의 둘째 딸 라헬을 사랑하게 된다. 그 라헬을 얻기 위해 야곱은 7년간 열심히 일하지만, 결과는 원하는 대로가 아니었다. 둘째가 첫째보다 먼저 결혼할 수 없다는 관습 때문에 먼저 첫째 딸 레아와 동침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야곱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였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안 야곱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다시 7년간 일을 더해야 했다. 첫째를 사랑했더라면 7년으로 족했을 것을, 둘째를 사랑한 죄로 7년을 더 일해야 했다.

두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은 후에도 야곱이 통과해야 할 관문은 또 남아 있었다. 이제 그만하면 그 동안 수고한 대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야곱의 심정이었다. 그러나 외삼촌 라반은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다가, 그 대가를 받는 방법을 야곱이 결정하도록 하되, 이제부터 그 방법을 취하도록 하자는 교묘한 제안을 한다. 어떻게 하든 호락호락 내보고 싶어하지 않는 기성의 정상사회 기득권자의 '현명한' 제안이다. 하는 수 없이 야곱은 그 제안을 따른다. 그러나 이제 야곱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는다. 얼룩무늬 양만을 자신의 몫으로 챙기겠다고 해놓고, 일종의 고대판 '유전자공학'을 동원해 튼튼한 얼룩무늬 양들을 양산한다. 튼튼한 암컷들이 교미할 때에는 얼룩무늬 나뭇가지를 보여 주어 얼룩무늬 양을 낳게 하고, 약한 암컷들이 교미할 때에는 그 가지들을 보여주지 않아 무늬가 없는 양들을 낳게 한다.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는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자신에게 정상적으로 합당한 대가를 치르기를 주저하는 외삼촌의 의도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비정상적인' 방법이다. 기존의 질서에서는 당할 수밖에 없는 약한 자가 발휘할 수 있는 지혜다. 마치 형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득권자의 의도를 역으로 이용하는 교묘한 지혜다. 야곱은, 장자는 근육질의 야성적 남성이어야 한다는 관념을 그대로 올무 삼아 뒤집어엎었으며, 이렇게 하면 네가 빠져나갈 길이 없으리라는 외삼촌의 생각을 역시 그대로 올무 삼아 상황을 역전시켜버린다. 야곱은 그 지혜로 승리를 거둔다. 야곱은 이렇게 일관되게 발뒤꿈치를 붙잡는 전략을 택한다.


4. 새로운 존재로서 이스라엘


그 야곱이 하나님과 맞대결을 하고 게다가 한술 더 떠 힘으로 이겨내기까지 했다. 그 뿐이 아니다. 축복의 확약까지 받아낸다. 장자권을 빼앗아 형의 노여움을 산 야곱은 한 동안 피신해 있던 외삼촌 집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형과의 화해를 위해 고향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하루 전 얍복 강 나루에 이르러 먼저 가족과 일행을 건너 보낸 다음 혼자 뒤에 남는다. 그런데 밤중에 한 사람이 나타나 야곱과 힘을 겨루게 되었다. 밤새도록 힘을 겨뤘는데, 그 사람은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편법으로 엉덩이뼈를 쳐 야곱이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밤새 그 사람과 힘 겨루기를 하였던 야곱은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차렸는지, 이제 그를 붙잡고 축복해달라고 졸라댄다. 여기에서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다' 곧 '속이다'는 뜻의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다' 또는 '하나님 통치하소서'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이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야곱은 이제 자신과 힘을 겨룬 신적 존재의 이름을 묻지만, 하나님은 이름을 밝히는 대신 야곱에게 축복을 한다. 이 일을 겪은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을 직접 뵙고도 살아났음을 경이롭게 여기며, 그 사건의 장소를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브니엘'이라 이름한다. 이 이야기는 야곱이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극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 사건은 야곱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적 재가 사건이요, 승인 사건이었다.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결국에는 그 씨름에서 이긴 사건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사건은,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온 삶에 대한 항변이요 그 항변이 정당하다고 인정받는 과정을 극적으로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씨름을 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정녕 첫째들의 하나님일 뿐입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그들에게만 계속 복을 내리는 하나님입니까?" 하고 항변하는 것을 말한다. 바꿔 말하면 "나 같이 둘째로 태어나 약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당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하는 항변이다. 그렇게 집요하게 덤벼드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 물음은 존재의 확인이다. "너는 누구냐?"하는 것이다. 야곱이 답한다. "야곱입니다." 이 대답은, "늘 쫓기고 불안에 떨던 아우입니다." 하는 대답이다. 스스로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 야곱에게 복을 내림으로써 그 존재를 승인한다. "네가 옳다! 너야말로 진실로 강한 자다! 나는 바로 너의 하나님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로써 야곱은 이제 더 이상 남의 발뒤꿈치를 잡아당겨야 하고, 남을 속여야 하고, 그래서 늘 불안에 떨어야만 했던 존재에서 당당한 주체로서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운명적으로 약한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이 태어난 것이 둘째 아들 야곱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빼앗긴 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곱은 기존의 사회에서 힘으로 지배하는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약한 자가 발휘할 수 있는 지혜를 통해 운명을 타파해나갔다. 진정으로 약한 자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야곱의 이야기는 보여 주고 있다. 약한 사람들의 힘, 그것은 강한 사람들의 힘을 그대로 이어받는 데서 생겨나지 않는다. 그 힘은 '근육질'의 힘, 완력을 무력화시키고 균열시키는 지혜에서 생겨난다. '운명'을 타개하려는 노력과 '진실'을 향한 대결, 씨름을 통해 터득되는 지혜다.


5. 화해와 공존의 새 세계  


둘째 아들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승인을 받았을 때 그 결말은 어찌되었을까? 둘째가 첫째를 지배하는 것으로 역전되었을까? 아니다. 그 결말은 화해요 공존이었다. 형 에서와 아우 야곱의 화해, 첫째와 둘째의 공존, 일등과 꼴지의 공존이었다. 아우 야곱이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형 에서를 배제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은 내버려둬도 잘 산다. 그러나 갖추지 못한 사람은 도와주어야 산다. 건강한 사람은 내버려둬도 산다. 그러나 질병을 앓는 사람은 거들어줘야 한다. 형 에서가 아니라 아우 야곱이 복을 받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한동안 각종 매체의 광고면을 장식한 문구가 있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 자사 제품이 최고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그 광고 시리즈는 제품 자체에 대한 설명보다는 일등과 이등의 운명이 엇갈린 역사적 사례들을 적절하게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광고 문구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극적으로 끄집어내어 표현해줬다는 데 있을 것이다. "맞아, 그렇지!", 그렇게 쉽사리 공감할 수 있었던 소재였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 사람들은 그와 같은 가치를 일종의 철칙으로 삼고 살아간다. 경쟁과 효율이 최우선시 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최고가 되고 싶어한다.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은 '되면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그 목표는 생존을 판가름하기도 한다. 일등이 되지 못하면,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정리해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기업을 운영하는 경우라면 파산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일찍부터 일등이 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목소리는 교육현장의 문제점을 잠시 생각하게 해주는 일화에 지나지 않을 뿐, 학교교육은 일등을 만들어내기 위한 경쟁체제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열린 교육' '열린 학교'를 지향한다면서도, 몇 해전부터 정부는 그 현상을 공공연하게 인정하듯 교육행정을 책임지는 부처 이름을 '교육인적자원부'라고 당당하게 내걸었다. 근대사회의 교육 자체가 계몽으로서의 교육과 노동력수급 과정으로서의 교육의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인간적 가치를 우선시한다는 것이 통념이고, 그래서 우리 교육의 목표는 '홍익인간'이다. 사람을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인적자원'이라는 개념을 교육과정에 서슴없이 들이대는 것은 국가경쟁력을 최우선시하겠다는 발상에서 비롯된다. 배우는 학생을 하나의 인격체로서보다는 예비 노동력으로 보겠다는 교육정책은 결국 경쟁과 효율의 가치를 교육현장에 여과없이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암만 교육 현장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애를 써본들, 기본이 바뀌지 않은 마당에 개선될 턱이 없다. 바로 그러한 현실에서 우리의 모든 세대들은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냉혹한 사회현실에서 몸으로 확인한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좌절의 아픔, 실패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어떨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한 번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좌절과 실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그럴 경우라면 어떨까? 아마도 더더욱 그 사실이 진실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할 것이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기에 더더욱 일등이 되기 위해 기를 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등은 제한되어 있다. 누구나 소망하는 대로 다들 일등이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기를 쓰면 쓸수록 그 장벽이 넘어서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다들 일등이 되기를 소망하지만, 누구나 일등이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등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문제가 아닌가? '일등주의'가 보편의 가치를 지니려면 누구에게나 그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그와 같은 가치는 일등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의 모순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대안은 허황한 신화를 믿고 좇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방식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야곱 이야기는 그 가치의 전환을 생각게 하는 실마리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는 물음 앞에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놓고 당당한 주체로 인정받기 위한 씨름에 나서야 한다. 모두가 그렇게 당당한 주체로 인정받을 때 화해와 공존의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다.
전체 0
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