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설교는 혼이 깃든 예술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1:09
조회
3718
*<주간기독교> 목회단상 02(040716)


설교는 혼이 깃든 예술


일주일 가운데 하루, 대개 금요일을 두문불출하고 설교 준비하는 날로 삼는다. 그러나 번잡한 한 주간을 지나다 보면 유혹을 받는 때가 있다. 나로서는 사정을 불문하고 하루만은 꼭 지켜내려고 하지만, 이 일 저 일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다 보면 그 하루도 지키지 못할 위기가 종종 닥친다. 그럴 때 동료들은 유혹한다. "아니, 양들에게 식은 밥을 먹인단 말이야? 토요일 밤새 준비해 주일 아침에 따끈따끈한 밥을 먹여야지!" "항상 쌀밥만 먹을 수 있나? 보리밥을 먹을 때도 죽을 먹을 때도 있지!" "목사가 믿음이 없어! 한 두 시간 앉아 기도하면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말인즉슨 그럴 듯해 보이지만, 나는 아직 웬만해선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아니 그 유혹에 넘어갈 수가 없다. 정말 영력이 뛰어나 내가 뱉는 말이 곧 설교가 될 수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나로서는 꼬박 하루 이상을 붙잡고 있어야 겨우 주일 아침에 20분 남짓의 설교를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설교는 예배의 한 부분일 뿐 유일한 핵심은 아니다. 또한 설교는 목사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교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과 지식, 그리고 경험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로서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길잡이일 뿐이다. 내가 평소에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고 해서 나에게 맡겨진 설교를 가벼이 여길 수는 없다. 준비되지 않은 설교를 들을 때 짜증스러움과 불쾌감을 알지 않은가. 물론 설교 그 자체를 뛰어넘는 카리스마나 영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 설교자라면 별도의 준비 없이도 청중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마치 장인이 각고의 노력 끝에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고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설교는 설교자의 혼이 깃든 예술이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풍경이 늘 우리에게서 감동을 자아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어떤 풍경이 한 컷의 사진에 담겼을 때, 또는 한 폭의 그림으로 재현되었을 때 우리는 새삼스럽게 감동한다. 사실 감동의 원천은 사진이나 그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대상으로 삼은 그 실제 자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실제를 그저 지겨운 일상의 하나로만 간주하고 무덤덤해져 있을 때 예술 작품은 그 실제에 담겨 있는 어떤 진실을 들추어내어 사람들에게서 감동을 자아낸다. 마치 설교란 그런 것과 같지 않을까?

나는 목사로서 매주간 작품을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그렇게 해서 일상의 진실, 성서의 진실을 드러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서 감동을 자아내기를 원한다. 아직은 모르겠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공력을 들여야, 도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정말 혼이 깃든 어떤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지 말이다. 그러나 유혹을 이겨내고 단 하루만이라도 지켜내려는 원칙은 내가 이 길을 걷는 한 폐기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청중 앞에서 선포해야 할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진실을 깨우치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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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묵 / 천안살림교회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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