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자본에 묶인 교회에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기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05-07-26 20:41
조회
4210
* 감리교신학대학교 '사람됨의 신학연구회 동문회' <사람됨의 신학> 창간준비 2(2003.여름)


신학으로 살아남기 - 자본에 묶인 교회에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기  


최형묵(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


1. 신학의 위기


'신학으로 살아남기'라는 표현은 도무지 심기를 편치 않게 만든다. 말이 되느냐 마느냐, 말이 된다면 도대체 무슨 뜻이냐를 헤아려야 하는 것 때문이 아니다. 나는 사실 이 제목을 듣는 순간 그 의미를 직감했다. 어법상 말의 성립 여부를 떠나 이 표현에는 심각한 위기의식이 담겨 있다. 도대체 얼마나 그 위기를 절박하게 느꼈기에 이렇게 말했단 말인가? '살아남기'라는 말은 죽느냐 사느냐라는 절박한 위기의식이 없이는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말이다. 이 주제에는 그와 같은 절박한 위기의식이 배어 있다. 그 위기의식을 직감하고서야 어찌 마음이 편할 턱이 있겠는가?

아마도 '신학으로 살아남기'라는 주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그 위기를 반영하는 것 같다. 하나는 신학 자체의 위기요 또 다른 하나는 신학하는 주체의 위기다.

신학 자체의 위기란, 신학의 효용성에 관한 의문과 더불어 신학의 고유성 내지는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 의문을 포함한다. 단순히 말하면, 과연 오늘 여전히 신학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전통적으로 지켜져 왔던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으로서 신학의 의의는 여전히 의심거리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교회는 여전히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의 존재 의의는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으로서의 지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신학이 단순히 신의 존재증명을 임무로 하는 학문도 아니며 또한 하느님이 현존하는 배타적인 거룩한 장소로서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인식은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다. 물론 신학은 운명적으로 신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고 또한 교회와 관련된 과제를 모색할 수밖에 없겠지만, 신학의 고유성과 효용성이 거기에 한정되는 않는다는 뜻이다.

신학은 인간학이라는 근대적 인식도 있거니와,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등장은 신학의 고유성과 효용성에 관해 더욱 새로운 인식을 낳았다. 신학은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에 관한 학문이라는 인식이다. 실천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체적 인식을 동반한다. 실천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 조건이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조건을 말한다. 배타적 장소로서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 자체가 주어진 조건이다. 실천이란 그 주체가 그 세계 안에 있으면서 그 세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실천 주체의 인식은 어떻게든 세계에 대한 인식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실천에 대한 성찰을 그 과제로 삼고 있는 오늘의 신학적 인식이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고 개입해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더욱이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의 주체, 곧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은 매우 다양하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실천 주체는 교회적 주체로서만이 아니라 자기에게 부여된 여러 관계 안에서의 주체로서 신앙의 의미를 묻고 살아가려 한다. 결국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에 관한 학문으로서 신학은 그 모든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어느 것이 신학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 없다. 그러나, 신학 자체의 위기를 절박하게 말해야 하는 까닭은 오늘의 신학이 실천의 주체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성찰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물론, 신학이 세계의 문제에 대해 언제 무관심한 적이 있는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어떤 신학, 그 어느 시대의 신학도 사실 세계에 관한 인식을 배제한 적은 없다. 그 모든 신학은 나름대로 세계 인식을 담고 있다. 그 점에서 문제의 상황은 신학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다. 세계에 대한 인식은 선언적 주장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어떤 주장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대신할 수 있고 대안 모색이 가능하다면 도대체 고민해야 할 일이 없다. '좋은 말씀'이라고 해서 정말로 현실에서 말 그대로 '좋은 말씀'이 되지 않는 상황, 그것이 문제다. 결국 문제는 그 세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너무나 포괄적이기에 간단히 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신학의 위기를 논할 때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수 있는 준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쉽게 말해 신학의 위기를 논하는 우리들의 '저의'가 분명히 있다. 그 저의는 도대체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신학들이 꽉 닫힌 듯한 세계에 어떤 돌파구를 열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일까? 궁극적인 구원의 전망을 말하는 신학에서 우리는 어째서 희망의 메시지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을 찾는 것이 오늘 '신학으로 살아남기'의 가능성을 찾는, 한 과정이 될 것이다.  

그 다음, '신학으로 살아남기'가 함축하는 위기의 두 번째 측면 곧 신학하는 주체의 위기 문제를 생각해보자.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 주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소위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동시에 신학하는 주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유념하고 있는 신학의 주체는 특별히 신학적 사유를 전문적인 자기 과제로 삼는 신학생(예비 목회자 및 신학자), 목회자, 신학자 등을 말한다. 신학하는 주체의 위기란 과연 이들에게 신학이 '생업수단'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회의와 관련되어 있다. 학생으로서 교과과정을 따라 배우는 것이기에 익히고, 목회자로서 오직 설교 그 자체를 위해 참조하고, 신학자로서 그저 익힌 지식이기에 전달할 뿐인 신학이 과연 '신학'일 수 있겠는가 하는 회의다.

신학이 신앙을 전제로 하는 실천에 관한 학문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신학하는 이는 마땅히 신학적 사유를 따라 자기의 삶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소위 '신학'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학은 자기와 세계를 변화시키는 유용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 같다. 더욱이 교회 현장에서는 그나마 어떠한 신학마저도 발을 붙이기 어렵다. 신학생들 또는 초년 목회자에게 "교회 현장에 가거든 학교에서 배운 신학을 버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권유되고 있다. 그 말이 현장에 적합한 새로운 신학적 사유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의미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교회 현장에서 권유되고 있는 그와 같은 말의 진의는 아예 신학을 버리라는 뜻에 가깝다. 신학적 사유를 배제해버리고 목회자가 습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교회행정 기능, 인간관계 기능 등일 뿐이다. 신학적 지식과 사유는 그나마 설교를 위해서만 그 존재의의를 인정받을 뿐이다. 하지만 그 경우마저도 사실상 신학적 사유는 제한된다. "절대 신학적 설교하지 말아라!", 이것이 또한 공공연하게 권유되고 있는 말 아닌가? 이 역시 '설교'와 '강의'의 차이를 구별하라는 권유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역시 그 말의 진의는 청중들의 삶을 건드려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뜻에 가깝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교회를 위한 신학'의 진의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옳고 그름을 떠나 교회의 존립에 위협이 되는 어떤 신학도 그 존재의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소위 '신학'에 종사하는 이들은 신학적 사유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다. 목회자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진지한 신학자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교회 안에서 진정한 신학자를 몰아낸다. 그래서, 오늘 이른바 성공한 목회자란 탁월한 행정가 내지는 경영자일 뿐 신학자와는 상관이 없다. 교회만이 유일한 신학의 장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신학을 필요로 하는 가장 유력한 장이 교회이다. 거기에서부터 신학이 유배당하고 신학하는 이들이 배척받는 현상은 신학이 위기에 처한 오늘의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심한 고통과 인내를 동반한다. 그러나 신학하는 이는 그 고통과 인내를 통해 희망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리고 그 희망을 발견할 때 역설적으로 기쁨을 맛본다. 오늘 현실은 그 기쁨을 원천적으로 앗아간다. 그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할까? 그 답을 찾는 것이 '신학으로 살아남기'의 가능성을 찾는, 또 다른 과정이 될 것이다.  


2. 닫힌 세계를 여는 신학


오늘 신학의 위기는 자폐증에서 비롯된다.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자폐증의 신학은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는 교회에 근거한다. 앞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느냐 않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오늘 한국 교회와 기독교는 단순 인구비율의 수치를 넘어서 훨씬 큰 영향력을 끼치는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예컨대 2000년 기준으로 기독교인의 인구는 25.6%(천주교 포함)인데 반해 국회의원 가운데 기독교인 비율은 64.8%에 해당한다. 이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을 실감하게 해 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그 영향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사회적 의제가 제기될 때마다 교회는 자기 견해를 표명해 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소위 주류 한국 교회에서 표명된 입장은 언제나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주5일근무제, 양심적 병역거부, 영화와 출판물을 둘러싼 논란, 그리고 최근의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우에 일관된 태도를 보여 왔다. 사회적으로도 쟁점이 된 교회적 사건들에 대한 태도 역시 항상 자기 방어적이었다.

다 아는 상식이지만,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태도 표명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 근거는 '성서적' '신앙적' 또는 '복음적'이라고 주장된다. 한마디로 말하면 말끝마다 '하느님' 이름이 붙는다. 바로 여기에, 오늘 신학적 위기를 발생시킨 근원이 도사리고 있다. 그 위기의 원인은 진리를 독점적으로 소유했다는 배타적 의식이다. 말끝마다 남용되는 하느님의 이름은 자기 정당화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어떤 주장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정당화되고 나면 그 밖의 다른 가능성은 사라진다. 적어도 그 논리 안에서는 그렇다. 그 밖의 주장은 '비성서적' '세속적' 또는 '인간적' 인 것으로 타당성을 갖지 못한다. 성속 이분법의 실체는 그렇게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다른 주장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배제 효과에 있다. 그렇게 자기 안에서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태도에서 바른 세계인식이 가능할 리 없고, 따라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다.

오늘 신학의 위기 극복은 그 폐쇄회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신학이 스스로를 해방할 때 새로운 세계를 전망하는 해방의 언어로 자리를 잡는다. 사실 신학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신학은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해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고유한 몫을 감당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학적 전환의 계기가 수없이 많지만, 사실상 기독교 신학의 출발 계기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의 예에서 우리는 신학적 인식의 고유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하고 '믿음'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을 때, 그 비판의 초점은 자기 의였다. 율법이 자기 정당화의 수단으로 오용되고 만 현실이다. 율법에 대한 맹신은 곧 자기 의에 대한 맹신이다. 바울이 율법을 비판하는 핵심은 거기에 있다. 바울이 율법을 문제삼는 것은 유대인들만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모든 배타적 선민의식을 문제시한다. 바울은 율법의 준수를 선민의 표징이자 동시에 구원의 방도로 아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들까지도 함께 비판한다(고전 1:18이하; 로마 1:16-17; 3:9이하 등 참조).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합리적 지식을 절대 가치로 알고 그 기준에 따라 문명인과 야만인을 가르는 점에서,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다고 본 것이다. 율법을 따르는 유대인이나 지혜를 추구하는 그리스인에게 공통되는 것은 자신들만이 진리를 독점했다는 배타적 의식이다. 그와 같은 자기 의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 배타적 의식은 유대인과 그리스인에게만 한정된 것만도 아니었다. 그 배타적 의식을 문제시한 바울은 세계 자체를 죄의 노예가 된 것으로 인식한다(로마 6장, 그리고 루이제 쇼트로프, "죄와 해방: 로마서를 중심으로", 김재성 엮음, 『바울 새로 보기』, 한국신학연구소 참조). 바울이 인식한 세계, 그것은 곧 로마제국이었다. 바울이 노린 것은 로마제국 자체가 자기 의에 가득 찬 세계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율법을 지키는 '선민', 지혜를 추구하는 '문명인', 제국의 질서를 떠받치는 '시민'은 바울에게서 한 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알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경험 세계를 절대시하고 신성시하는 오만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것은 모두 이미 인식한 세계를 완결된 세계로 봄으로써 더 이상 다른 가능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폐쇄적 세계이다. 그 닫힌 세계를 바울은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그 사실을 말하는 데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는 가장 적절한 본보기가 되었을 뿐이다.

바울은 그 폐쇄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제시한다.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가능성, 곧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인간성의 표상이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답이면서 동시에 답이 아니기도 하다. 닫힌 세계를 표상하는 율법을 대신해 열린 세계를 표상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는 답이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취해야 할 그 무엇을 명확하게 손에 쥐어주지 않는다. 그 점에서 답이 아니다. 바울은 율법을 따른다면서 사실은 자기 의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역시 그와 같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에 쥐어지는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율법조문처럼 명문화할 수 어떤 모범을 제시하지 않는다.

바울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놀랍게도 예수의 삶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다(로마 5:6-11 등 참조). 그것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다. 바울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신관의 혁명, 종교의 혁명, 신앙의 혁명을 의미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신은 모든 것을 가진 존재였다. 또한 그 신의 대리인 또는 신의 아들 역시 모든 것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제왕들은 저마다 신의 대리인으로 또는 신의 아들로 자처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든 재력과 권력을 한꺼번에 거머쥔, 그 위엄 있는 제왕들을 실제 신으로 섬겼다. 그것이 상식이었다. 더욱이 제국 로마는 그러한 상식적 세계관의 총 본산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그렇게 알고 있고 그 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바울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가 신이라는 인식에서 모든 것을 비워버린 존재가 신이라는 인식의 혁명이다. 신의 자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채워져서는 안 된다. 어떤 구체적인 형상으로 채워져서도 안 되고, 돈이나 재물로 채워져서도 안 되고, 권력으로 채워져서도 안 된다. 인간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도 안 된다.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버리고, 30여 년 동안 자기를 지탱시켜준 자기의 몸마저도 버린 그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은 바로 이와 같은 혁명적 전환을 의미한다.

그 비워버림의 극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비워버린 그 예수에게서 모든 것을 비워버린 하느님을 본다. 바울의 그와 같은 인식은 매우 근본적이며 동시에 매우 정치적이다. 로마제국 안에서 십자가는 제국의 질서에 반하는 대극점이다. 십자가는 로마제국 안에서의 '악의 축'이다. 수치스러운 것일 뿐 아니라, 로마제국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도발적인 것이다. 흔히 로마제국 안에서 십자가형은 제국의 질서에 도전하는 정치범에게 적용된 사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같은 정치범이라도 로마의 시민에게는 십자가형이 적용되지 않았다. 십자가형은 로마의 시민이 아닌 노예와 같은 범주의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사형제도다. 제국의 시민 경계 밖에 있는 이들에게나 적용되는 사형제도인 것이다(닐 엘리엇, "십자가의 반제국적 메시지", 김재성 엮음, 앞의 책 참조). 놀랍지 않은가? 원자폭탄은 베를린이 아닌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그들만의 세계에서는 '악의 축'에 해당하는 국가에 행해지는 어떠한 보복도 정당화된다? 탈레반 포로에게는 제네바 협정마저도 적용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제국의 논리, 자기 의의 논리를 확인한다. 그러므로 제국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십'자도 언급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은 한 젊은이가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제국의 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진정한 확신을 본다. 사실상 자신이 누리는 그 모든 것을 정당화해 줄 뿐인 욕망을 붙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믿음과 상식을 죄의 종노릇하는 것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바울의 확신이다. 바울이 진정으로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을 비워버린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다. 그가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를 역설한 진정한 속뜻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무력하거나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릇은 비어 있기에 그릇으로 용도를 다한다. 집은 빈 공간이 있고 비어 있는 창문이 있기에 집으로 소용된다. 바퀴가 바퀴로 소용되는 것은 바퀴의 중심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노자,『도덕경』11장 참조).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한 요한의 해석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바울 역시 그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의 신학자 칼 바르트마저도 기어코 노자의 빈 수레바퀴만큼 적절한 비유가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칼 바르트, 『로마서강해』7장 참조). 인간의 역사가 그저 순진하게 발전만 하리라고 보았던 유럽인들의 낙관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히틀러를 그리스도의 화신으로 떠받든 독일교회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에 대항한 칼 바르트가 아니었던가!(신학도들아, 칼 바르트의 논리를 배우지 말고 그 위기의식을 배워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뛰어넘으며, 동시에 역시 자신들의 힘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로마제국의 허위의식을 뛰어넘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 전인미답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텅 비어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비어 있기에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텅 빈 근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접하고 전인미답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신학으로 살아남기', 아니 '신학으로 살아가기'란 바로 그 발걸음을 의미한다.


3. 새로운 주체로 살아가기


한마디로 신학의 길은 늘 새로운 가능성을 좇아가는 길이다.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인식하는 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이 하느님을 대신할 수 없다면, 하느님을 추구하고 그 하느님의 역사적 현존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당연히 그 어떤 것에도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무한히 새로운 가능성을 좇는 것 아니겠는가? 그 어느 것도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면, 우리가 마치 진리를 독점한 듯이 행세할 수는 할 수는 없다. 그저 무한히 열린 가능성으로서의 진리를 우리는 추구할 따름이다.

무한히 열린 가능성으로서 진리를 추구하는 이는 언제나 새로운 주체로의 거듭남을 추구한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오물로 여깁니다."(빌립 3:8)라는 바울의 고백은 새로운 주체로의 갈망을 함축한다.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 또는 제국의 '시민'으로서 정체성을 부여했던 조건들을 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한 것이다. 오늘 신학을 하는 이들에게도 그와 같이 새로운 주체로의 거듭남을 위한 결단이 요구된다.  

오늘 우리들이 오물로 여겨 내팽개쳐야 할 낡은 정체성의 조건들은 과연 무엇일까? 신학이 교회에서 유배당하는 현실은 그 조건이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어째서 소위 '성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신학적' 선포가 교회 안에서 배척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 추구하는 욕망에 흠집을 내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교회 안에서 추구되고 있는 것은 신앙의 이름으로 치장된 물질적 육체적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소위 '성장하는' 교회에서 금기되는 코드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불문율이 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말라!", 그리고 "미국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목사의 설교 가운데서 그와 같은 내용이 주를 이루는 교회는 거의 틀림없이 작은 교회들이다. 그 사실은 오늘 주류 한국 교회의 정체성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오늘 한국 교회는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 가운데 자본주의적 가치체계를 당연하게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이에 관한 견해로는 최형묵, "욕망과 배제의 구조로서의 기독교적 가치", 『당대비평』14[2001. 봄] 참조). 그래서 그 질서와 가치체계에 균열을 내는 일은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두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최근 서울 시청앞 기도회 사건은 한국 교회의 그 불안감을 입증해주는 단적인 사례이다. '천국'을 바라는 '성도'들이 무엇이 불안해 그렇게 모여 울고불고 한단 말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한국 교회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은 현재의 주어진 질서와 가치체계 안에서 모순 없이 안녕을 누리고픈 욕망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오늘 이 땅에서 '신학으로 살아남기'란 그 질서와 가치체계 안에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존하는 것은, 그 닫힌 질서와 체계에 균열을 내는 비판적 성찰로서의 신학을 거세당한 교회 행정가 내지는 경영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신학으로 살아남기'란 새로운 대안을 추구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으려는 여정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미 자본에 포박된 교회 현실이 그 길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스스로 교회적 주체이기를 포기하는 전략, 아니면 교회를 재구성하는 전략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

교회적 주체이기를 포기하는 전략은 달리 말하면 '교회의 해체 전략'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교회 존립조건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하여 기성교회의 해체를 의도함과 동시에 탈교회적 주체의 형성을 의도한다. 엄연히 교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에서 탈교회적 주체의 형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취할 수 있을지는 열려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급진적 전략은 일체의 교회 중심주의를 부정하며, 탈교회적인 그리스도인의 존재방식에 중요한 의미를 둔다. 더불어 교회가 진정한 소통의 구조를 갖추기를 지향한다(김진호, 『반신학의 미소』, 외 여러 글들 참조).  

교회의 재구성 전략은 교회 해체 전략의 모호성을 극복해보려는 시도에 해당할 것이다. 자본과 권력에 포박되어 있는 기존의 교회가 해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해체의 전략과 재구성의 전략은 근본적인 입지점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전략은 엄연히 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여 그 구체적 대안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마치 바울이 유대인을 공격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유대인이 구원받기를 갈망했고 자신 또한 어떤 면에서 유대인의 한계 안에 있음을 뼈저리게 고백했던 측면과 상통한다(로마 9:1-5 등 참조). 유대인의 유기를 바라기보다는 그 유대인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했던 그 측면이다.

우리 현실에서 대안을 추구하는 많은 교회들의 유형을 대별해 각기 어느 교회가 해체의 전략에 입각해 있고 어느 교회가 재구성의 전략에 입각해 있는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이다. 굳이 말한다면 아마도 많은 대안의 교회들이 재구성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잠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 초점의 차이를 다시 한 번 대별해 본다면 여전히 미묘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체의 전략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다양한 존재방식을 강조하고 따라서 교회적 존재방식을 그 가운데 하나로 평가한다면, 재구성의 전략은 그리스도인의 그 다양한 존재방식 가운데서도 교회적 존재방식이 여전히 유력한 형태라는 점을 유념하여 그 변화를 시도한다고 할 것이다.

여전히 가능성의 영역(물론 현실로 존재하기도 하지만)으로 있는 두 형태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기대되는 '신학으로 살아남기'(신학적 주체의 생존) 방식을 예상해볼 수 있다. 앞서 우리가 유념하고 있는 신학적 주체가 주로 신학생, 목회자 및 신학자라는 점을 전제했는데, 새로운 대안적 주체를 전망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들 모두가 기성 교회의 위계질서 안에서 '성직'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 형태는 교회의 목회자를 포함하여 사회에서의 열린 지성으로서 역할 또는 다양한 어떤 직업을 갖고 그 안에서 신학을 하는 이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어떤 활동을 하는 형태 등 다양하게 전망해 볼 수 있다. 물론 그 가운데 많은 비율의 사람이 목회자로서 역할을 감당할 가능성이 많다. 그 경우라면 당연히 특권적 성직자로서보다는 소통의 능력을 중시하는 지도자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닫힌 위계체제를 해소하고 성원간의 소통을 지향할 뿐 아니라 교회와 교회 밖 사회와의 소통을 지향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이미 짜여진 사회적 질서 안에서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신학으로 살아남기'라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다. '신학으로 살아남기'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 위기의식을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 위기의식은 필수적으로 새로운 주체로의 거듭남을 요청한다. 우리가 고민하고 시도해야 할 것은 새로운 주체로의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 길을 찾고 나서는 것이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여전히 '연대'의 미덕을 소중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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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살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