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사랑, 인륜의 기초 - 요한1서 4:7~12[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9-03 16:17
조회
1183
2023년 9월 3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사랑, 인륜의 기초
본문: 요한1서 4:7~12



오늘 우리는 요한1서 메시지의 절정에 이른 대목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요한서신은 요한복음과 함께 사랑의 공동체 전통을 대변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저자가 동일 인물인지는 검토의 여지가 있지만, 복음서와 서신이 공통되는 정신을 밑바탕으로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이 같은 공동체의 전통에 기반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 초기 교회들 가운데서 요한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를 대변합니다. 사랑을 배제한 교회가 있을 수 없지만, 정말 사랑의 공동체를 온전히 구현하고 있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요한 공동체를 특별히 ‘사랑의 공동체’로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점에서 그럴 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던 시절 제자들은 그야말로 ‘사랑의 공동체’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후 교회들은 다소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곧바로 재림하시리라 믿었는데,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모습으로 그 재림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지켜나가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그때 신앙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여러 가지 대안들이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대안이 교회의 제도화였습니다. 교회를 조직화하여 질서를 만들고 또한 신앙과 윤리 규범을 확립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적 교회의 모습은 어떤 면에서 그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 곧 교회 제도화의 전통을 대변하는 사도가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교회를 조직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조직화한 교회가 베드로를 예수님 다음가는 권위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교회 대안들 가운데는 그와는 다른 대안도 있었습니다. 제도화가 아니라, 보다 친밀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대안이었습니다. 바로 요한으로 대변되는 ‘사랑의 공동체’ 전통입니다. 요한복음이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항상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강조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불가불 조직화의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위험한 함정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보는 것과 같은 함정입니다. 사랑이 식어버린 교회,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 되어 버린 사람들로 가득 찬 교회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큰 교회를 지향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위험한 경계를 넘지 않고 사랑의 교회로서 생명력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한의 편지는, 바로 그와 같은 요한 공동체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서신은 또 다른 문제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제도화의 위험성에 또 다른 위기를 마주합니다. 잘못된 교리에 맞서야 하는 상황입니다. 단순히 교리적 논쟁의 상황이 아니라 분파와의 갈등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소위 영지주의 분파와의 갈등 상황입니다. 영지주의는 지상의 삶, 육체적인 삶을 헛된 것으로 보고 영적 지혜를 추구하는 경향을 일컫습니다.
본문 말씀은 한편으로는 그 영지주의적 교리에 대한 해명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로 앞의 내용(4:1~6)은 그 잘못된 신앙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말씀은 그와 대비됩니다.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지상의 삶의 긍정’입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의 요체입니다.
첫 번째로 본문 말씀은 지상에서 육신으로 삶을 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하는 진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영적 지혜를 추구하는 전통에서는 인간 예수를 허깨비와 같은 존재로 봅니다. 지상에서의 육신의 삶은 의미 없고 그 안의 영만이 진실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몸을 지니고 지상에서 삶을 사신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보여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진실을 일깨웁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4:12). 하나님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또한 하나님의 도리를 따르는 우리의 몫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땅 위에서의 예수님의 삶이 허깨비와 같은 것이 아니었듯이,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또한 허깨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만큼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삶, 그것이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맡겨진 도리입니다. 이 땅 위에서 사는 우리의 삶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도리요 세상사의 근본 도리입니다. 그것이 인륜의 기초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하는 일일 뿐입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그 의미 또한 충분히 헤아리고 있다고 여겨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방금 그 말씀의 다시금 새겼지만, 굳이 그렇게 열을 올려 말씀의 뜻을 새기지 않아도 그저 본문 말씀을 읽는 것 그 자체로 그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분명한 말씀인데, 새삼 말씀을 대하는 가운데 주목하게 되는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4:10) 하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그래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4:10)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 가운데서 이뤄야 할 사랑의 근거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이 강조되고 있는 점입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시대의 발상으로는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내 이웃을 사랑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훨씬 그럴듯하게 여겨질지 모릅니다. 능동적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의 풍토에서라면 더더욱 그것이 적절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 그리고 본문 말씀뿐 아니라 사랑에 관한 성서의 일관된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진실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불가항력성을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뛰어넘는 것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정해 놓은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내가 누릴 때는 말할 것 없거니와 베푼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나를 넘어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사랑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경우 그것은 일종의 집착일 뿐입니다. 사랑이라 착각되고 있을 뿐 자기 욕망의 확장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철저하게 나를 뛰어넘어 상대를 마주하고 대하는 관계 안에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람들 가운데서 이뤄야 할 사랑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에 근거한다는 것은 사랑의 그 철저한 이타성을 뜻합니다.
그것이 곧 인륜의 기초입니다. 그것은 개인적 대면관계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형성하는 데서는 물론 모든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서 기초가 되어야 하는 진실입니다. 철학자 헤겔이 가족, 시민사회, 그리고 마침내 국가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관철되는 인륜을 강조한 것은, 이타적 사랑의 원리가 온전히 구현될 때 인간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한 것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사랑의 구체화요 보편화입니다.

아마도 본문 말씀에 근거하여 보다 내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결론 내리기를,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두가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거꾸로 그 인륜이 파탄 난 특별한 한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말씀이 일깨우는 진실을 더 깊이 새기고자 합니다.

딱 100년 전 일입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간토 지방에서 대규모의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재해였습니다. ‘재난 공동체’라는 말이 있듯이,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그 재난에 대처하기 위하여 비상한 행동을 감행하는 지혜를 발휘합니다. 혼자만의 안전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안전을 위해, 놀라운 이타적 실천을 행하는 숭고한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923년 간토대지진을 뼈아프게 기억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단지 자연적 재난으로 그치지 않고 인륜 파괴의 재난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마다의 생명에 대한 권리와 자주권을 부인하고 강압적 폭력으로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광기를 압축했다고 할까요? 그 재난의 현장은 인륜 파괴의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단지 평범한 일본인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수많은 조선인과 중국인, 그리고 제국주의 일본 사회에 동화될 수 없었던 사회주의자들과 소수자들이 무참히 살육당했습니다. 그렇게 학살당한 조선인 희생자는 최소치로 잡아도 6,000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주로 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그 무참한 살육이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일본 당국의 조장과 방조가 결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내무성이 계엄령 선포와 함께 각 경찰서에 내린 내용중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었습니다.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 사실상 공공연하게 살육을 조장한 것입니다. 근거 없는 의혹이 확산되었고, 그 의혹은 더 심각한 거짓 소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조선인(또한 중국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 이런 소문입니다. 조선인과 중국인 등에 대한 적개심을 유발하였고, 그로 인해 무참한 살육이 정당화되었습니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 폭동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태를 방조하였을 뿐 아니라 사실상 조장하였습니다.
그 비극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일본 당국은 말할 것 없거니와 해방된 조국 대한민국에서도 그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일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100년째 되는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양심적인 일본인들 가운데서, 그리고 한국의 시민사회와 교회 일각에서 그 비극을 기억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묻고자 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째서 아픈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려 하겠습니까? “망각은 노예의 길이지만, 기억은 구원의 신비이다.” 비극을 기억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얻어 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인륜이 보편적 규범이 되는 세계, 사랑의 기쁨을 모두가 온전히 누리는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스스로 온전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면 내 이웃의 소중함을 알고, 나 밖의 모든 사람이,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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