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정의와 평화가 흐르게 하여라 - 아모스 5:21~24[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3-09-10 16:50
조회
1140
2023년 9월 10일(일) 천안살림교회 기후정의주일
제목: 정의와 평화가 흐르게 하여라
본문: 아모스 5:21~24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4).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선포는 언제 들어도 큰 울림을 줍니다.
예언자 아모스는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변방 드고아에서 양을 치고 무화과나무를 가꾸어 먹고 살던 농부였습니다(1:1, 7:14~15). 변방의 농부 출신 예언자로서 아모스는 스스로 체득한 경험에서 비롯되는 예민한 감각으로 당대 사회와 종교를 향하여 놀라운 예언을 선포합니다. 그는 당대 주류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을 뿐 아니라 명망 있는 어떤 계보에도 끼지 않는 야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그의 선포는 더욱 진솔하게 성서의 정수를 잘 집약하고 있습니다.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백 번 들어도 지당한 말씀이지만, 선포된 그 문맥을 보면 충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5:21~24)
하나님께서 당신을 섬기겠다는 백성들의 예배를 받지 않겠다는 선포입니다. 아마도 백성들은 예배를 정성껏 드렸을 것입니다. 본문 말씀 자체가 시사하고 있듯이 매번 정해진 시기에 예배를 드렸고, 또한 그때마다 번제물과 곡식 제물을 정성껏 드렸습니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형식과 절차, 게다가 그 형식과 절차를 지키는 데 정성까지 손색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예배를 받지 않겠다고 하신 것은, 그 예배와 함께 꼭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의였습니다. 백성들의 삶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 곧 정의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선포된 이 말씀은, 출애굽 사건과 율법, 그리고 예언자의 선포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성서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예배와 삶의 일치, 종교와 윤리의 공존, 하나님에 대한 섬김과 이웃에 대한 섬김의 일치가 그 정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예배는 그 믿음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내용으로서 정의의 실현과 직결됩니다. 구체적인 삶 안에서 정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으로서 예배는 허망해집니다. 아모스는 바로 이런 사태를 두고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가 그렇게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맥락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왜 그렇게 선포했을까요?
자신의 이름으로 기록을 남긴 최초의 문서 예언자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왕국이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주전 8세기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절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한 시절입니다. 권세가들은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고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역시 권세가들과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그들이 인도하는 종교는 경제적 성장과 번영을 축복하는 의식에 다름 없었습니다.
바로 그 시절 하나님께서는 시골 농부 아모스를 불러 준엄한 뜻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에게 환상을 보여줍니다(8:1~3). ‘다 익은 과일 바구니’였습니다. 탐스럽게 보이지만 이미 종말에 이른 이스라엘의 운명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풍요로워 보이지만 정의가 사라지고 평화가 무너진 현실입니다. 권세가들이 온갖 속임수와 못된 짓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현실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정의가 사라진 현실 가운데서 드리는 예배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 본문 말씀의 요체입니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성소에서 드리는 제사, 곧 예배를 통해 행복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생활은 그저 주어진 그대로 질서 안에서 그냥 그렇게 영위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이뤄져야 할 하나님의 공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사에만 몰입하고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정의가 부재한 현실을 꼬집으며, 그 정의가 부재한 현실을 외면하며 자족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습니다.

아모스의 이 선포는 마치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을 향한 음성과도 같습니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창조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기후정의 주일을 지키자는 제안서 <2023년 창조절 안내서>는 본문 말씀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새기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 종교행사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너희 집회와 성회는 이제 신물이 난다. 너희가 벌이는 종교 프로젝트들, 너희가 내거는 허영에 찬 슬로건과 목표에 진절머리가 난다. 너희의 기금모금계획 홍보활동과 이미지 연출도 지긋지긋하다. 너희 자아나 만족시키는 시끄러운 음악들은, 나는 이제 들을 만큼 들었다. 너희가 나를 향해 노래한 적이 언제더냐?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내가 바라는 것은 큰 정의다. 큰 바다 같은 정의! 내가 바라는 것은 공평이다. 강 같은 공평! 이것이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바라는 전부다.” (2023 세계교회 창조절 홈페이지, <2023년 창조절 안내서> / 기독교환경운동연대·한국교회환경연구소 번역)
이렇게 새기면 그 의미가 조금 더 실감 나게 다가올까요?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의지를 갖고 노력하지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보게 해줍니다. 가장 근본적인 진실, 곧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 무엇인지 다시 새기게 하여 줍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신실한 행위로서 정의의 구현을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정의’로 번역되는 ‘체다카’는 좁은 의미에서 인간사회 안에 구현되는 분배정의만을 뜻하지 않고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신실한 인간의 실존을 형성하는 모든 것, 곧 평화, 해방, 속죄, 은총, 구원 등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서의 정의는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행위에 상응하여 인간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서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서에서 신실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로서 정의는 억압받는 백성을 선택하여 그들과 약속을 맺는 것을 중요한 거점으로 합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서 정당하지 못한 대우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의 해방에 이르게 되고, 이로부터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은 하나님의 신실함을 자신들의 인간관계 안에서 구체화해야 할 의무를 짊어지게 됩니다.
성서는 일관되게 억압받는 백성을 해방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행위를 환기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이뤄져야 할 정의를 강조합니다. 출애굽 사건의 맥락에서 제시되는 계약법전(출애 20:22~23:33)은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함으로써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 정신은 이후 신명기 법전(신명 12~26장)과 성결법전(레위 17~26장) 등에서도 다시 확인되고 있고, 예언자들의 선포에서 또한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언자 아모스가 선포한 본문 말씀 또한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정신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누가 6:20)라는 예수님의 선언에 이르기까지 일관됩니다.
구체적으로 그 정의의 요체는, 가난한 사람을 비롯하여 그 누구든 생존에 필요한 것을 충족하는 것을 함축합니다. 만나 이야기(출애 16:1~36), 주의 기도(마태 6:9~13, 눅 11:2~4),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최후심판의 비유(마태 25:31~46) 등은 그 정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 정의는 인간 삶에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 특히 희년법(레위 25:8~55)과 예언자들의 선포(이사 11:6~8 등)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적대를 극복하고 온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온전한 평화(샬롬)의 세계입니다. 성서는 그 평화가 정의를 바탕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일관되게 증언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후정의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후위기를 넘어 기후정의를 말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의 지구가 겪고 있는 기후위기를 정의의 관점에서 돌아보며 대안을 모색하려는 것입니다. 정의는 관계의 온전함을 뜻하며 그 온전한 관계 안에서 저마다 삶을 온전히 향유하는 것을 뜻합니다. 기후위기는 인간 주변의 환경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사회의 부정의가 곧 기후위기를 불러일으켰으며, 그것은 곧 세계 자체의 부정의를 뜻합니다.
단적인 하나의 예를 볼까요? 오늘날 지구의 소득 상위 10%가 전체 온실가스의 49%를 배출하고 있는 데 반해 소득 하위 10%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체 양의 1%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득 상위 10%는 기후위기 상황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반면 소득 하위 10%는 기후위기로 인해 생존의 한계상황에 부딪혀 있습니다.
우리가 기후정의를 말하는 것은 그 부정의를 초래하는 인간 삶의 방식을 새롭게 하고, 그 삶의 방식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세계 안에서 온전한 정의를 이루고자 하는 데 그 참뜻이 있습니다.

오늘날 기후위기나 생태위기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수의 생태지향적 운동가들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있는 교회와 시민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에게도 중요한 현안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기업가들도 말하고 있으며,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책은 유수한 기업들의 슬로건이 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이 기후위기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그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공감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대처방안에서도 과연 모두가 일치할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기 의미 있는 실천에 참여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각기 그 대처방안이 오늘의 기후위기를 불러일으킨 근본적인 원인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제한적인 의미를 지닐 뿐입니다.
오늘 기후위기가 무한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그에 따른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습니다. 특별히 무한한 이윤추구에 따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인해 야기되는 위기현상입니다. 무한한 이윤추구와 무한한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그에 따른 삶의 방식은 그 안에 원천적으로 불의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상품화하여 착취함으로써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 자연을 대상화하여 끊임없이 수탈함으로써 자신의 생존 기반 자체를 허물고 있습니다. 오늘의 지질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하자는 의견이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지만, 그 대신에 ‘자본세’(Capitalocene)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는 것은 자본주의가 빚어낸 폐해를 엄중하게 인식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특별히 자연은 상품생산을 위한 자원을 제공하는 ‘수도꼭지’이자 동시에 그 상품을 활용하고 남은 찌꺼기를 처리하는 ‘쓰레기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대량의 상품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가스는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되고 있고, 이후에 버려진 각종 유해 물질은 생태계를 교란하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터전이자 동시에 모든 생명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온생명을 이루는 자연이 아니라 그저 활용가능한 대상으로만 여겨온 탓입니다.
그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채 기후정의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사회 안에서 불의를 초래하는 경제체제와 삶의 방식을 바꿔 정의를 이루는 것은 물론 그간 대상화해왔던 자연을 마땅한 주체로 인정하여 인간과 자연의 정의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 인간과 자연의 분리를 극복하고 자연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 온전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정의로운 평화의 이상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각자,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추구하는 실천적 대안들은 그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여야 합니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은 서로 연관되어 있는 다양한 영역과 다양한 형태의 실천을 포괄합니다. 무절제한 욕망을 따르기보다는 검약한 생활을 함으로써 자원의 남용을 억제하고 유해물질의 배출을 줄이는 개인적·공동체적 실천은 오늘 기후위기를 저마다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동시에 지녀야 합니다. 이윤추구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체제의 형성과 삶의 방식을 추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근본적 대안을 향한 본격적인 발걸음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원의 활용과 배분을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 내맡기지 않고 사회적 구성원 모두의 책임으로 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보장하는 정치체제의 형성을 동반해야 합니다.
지구적 차원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은 각 개인의 마음과 태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정의를 보장하는 삶의 질서를 제도적으로 확립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평범한 사람들도 그 정의로운 삶의 질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를 때 누구도 그 물결을 거스를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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