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삶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16-03-30 21:03
조회
781
<새가정> 2016년 4월호 원고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삶  


1.

“인간을 인간으로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 관계라고 전제한다면 그대는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와만 등으로 교환할 수 있다. 그대가 예술을 향유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예술적인 교양을 갖춘 인간이어야만 한다. 그대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한다면, 그대는 현실적으로 고무하고 장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어야만 한다. 인간에 대한 - 그리고 자연에 대한 - 그대의 모든 관계는 그대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그대의 현실적·개인적 삶의 특정한 표출이어야 한다. 그대가 사랑을 하면서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사랑으로서의 그대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그대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생활 표현을 통해서 그대를 사랑받는 인간으로서 만들지 못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무력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어떤 현자의 말일까?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수고』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한 대목이다. 인간은 “사랑을 사랑과만, 신뢰를 신뢰와만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것이 불가능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주는 사랑과 신뢰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되묻고 부족한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요, 나의 사랑과 신뢰의 진정성에 의심이 없는데도 상호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그 충족을 촉구하는 것이 또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어떤 경우든 직접적인 대면관계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이 인간적인 방법이다.

문제는 그렇게 해도 해결이 안 되는 경우이다. 그 때 사람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것에 의존한다. 그 다른 것이 무엇일까? 돈이다. 적어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매개하면 거의 불가능한 게 없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오늘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의 실체를 분석하고자 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도 인용하고 있지만, 셰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타이몬』에서 이렇게 간파했다. “돈은 문둥병을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고, 도둑을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힌다네. 늙어빠진 과부에게 청혼자를 데려오고, 과부가 오월의 청춘으로 돌아가 청혼자에게 가게 한다네. 눈에 보이는 신, 오, 마음의 시험자, 너의 노예가, 인간들이 성내고 있음을 알라! 이 짐승이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도록!”


2.

마침내 그 ‘짐승’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 아예 영혼까지 지배하는 실상을 오늘 한국사회에서보다 더 적나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경우가 있을까?

학생들을 가르치는 도정일 선생이 신입생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다섯 가지 꼽아보라고 했을 때 ‘돈’이 단연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 다음 목록은 행복, 성공, 가족, 사랑, 건강 등이며, 종종 ‘정의’, ‘눈물’ 등이라는 답변도 있었지만 대세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어 그야말로 예외적이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몇 해 전 국제적인 여론조사 결과로도 입증되고 있다. 돈이 인생 최고의 성공 증표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한국인의 69%가 그렇다고 응답하여, 조사대상 9개 나라에서 중국과 동률 1위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인도가 67%로 3위, 일본이 63%로 4위,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캐나다 같은 나라들은 33~27% 사이를 기록하고 있다.

과연 돈이 무엇이길래? 이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교환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환수단이라고 했을 때는 그 자체로 다른 것을 대신할 만한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견해도 제기된다. 돈이 교환수단으로 통용되는 데는  다른 모종의 약속, 엄밀하게 말하면 인위적인 채권과 채무관계를 규정하는 권력관계가 전제되어 있다는 견해다. 사실상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 교환수단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견해가 훨씬 솔깃하다. 그렇다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태도는 더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전도된 삶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현실이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경향이 세계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이 그 가운데서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다지 긴 해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국가 정책과 제도,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의 통념을 통해 쉽사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정상이 일정한 궤도에 이르면 삶에서 중요한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마땅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전환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는다.


3.

오늘 사람들의 전도된 삶은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시장경체제에서 비롯되었다. 돈을 갈망하는 경향은 어떤 시대에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시장경제체가 자리잡기 전에는 필요에 따른 사람을 영위하였을 뿐 무한한 욕구를 추구하고 그 욕구를 추구하는 구체적 형태로서 돈에 대한 갈망은 억제되어 있었다. 주의 기도가 가르치는 ‘일용할 양식’은 인간 삶의 필요조건을 말하는 것이지 무한한 욕구충족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필요의 충족을 이상으로 삼아온 지혜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거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시장경제체제를 ‘사탄의 맷돌’로 비유하고 있는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의미심장한 진단을 내린 바 있다. 폴라니는 인류역사에서 시장은 늘 존재해 왔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회 안에서 작은 한 기능을 담당했을 뿐 오늘날처럼 전 사회를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도저히 상품이 될 수 없는 자연(토지)과 인간(노동력)마저도 상품화하여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도록 만든 오늘의 시장경제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지극히 인위적인 것으로, 인류가 최근세의 역사에서 경험한 현상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과거에 시장이 사회 안에 묻혀 한 기능을 한 것과 달리 거꾸로 시장이 사회 전체를 집어삼키는 현상은 최근의 역사적 현상일 뿐으로, 그야말로 ‘거대한 전환’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폴라니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사회를 집어삼키는 시장경제체제에 대항하여 인간 삶을 지키는 운동을 가능케 하는 정신적 가치의 기원을 성서에 찾고 있다. 폴라니는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정신으로 세 가지를 꼽는데, 그것은 죽음에 대한 깨달음, 자유에 대한 깨달음, 사회에 대한 깨달음이다. 첫째 죽음에 대한 깨달음은 구약성서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오히려 인간은 그 유한한 삶의 한계 안에서 의미있는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을 말한다. 둘째 자유에 대한 깨달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 나타나는데, 모든 개인의 인격 하나하나가 우주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라는 자각이 그것이다. 셋째 사회에 대한 깨달음은 산업사회에 이르러 비로소 이뤄진 것이지만, 역시 성서의 유산과 무관하지 않은 초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드러났다. 폴라니는 바로 그 정신으로 인간은 모든 종류의 불의와 자유를 억압하는 조건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는다고 진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통찰은 무한한 욕구를 추구하는 가운데 정작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어떤 가치를 지향하여야 하는지 새삼 일깨워준다. 그 깨달음은 단지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적 각성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 사람들이 돈과 경제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내달리는 것이 인간 본성에 따르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에게 그러한 경향을 추동시킨 역사적ㆍ사회적 조건이 있다는 것을 말하며 그 조건은 새롭게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단적으로 말해 일상적인 필요의 충족을 넘어 무한한 욕구의 충족을 향하여 내달리게 만드는 삶의 방식과 그것을 강요하는 체제가 문제이며 그 삶의 방식과 체제는 변화가능하다는 것이다.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삶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삶의 방식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결코 낯선 것만은 아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삶의 태도, 그러한 경향의 사회적 현상으로서 경제성장에 대한 환상적 기대가 압도하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도 그것을 뛰어넘어 진정한 삶을 누리기 위한 시도들은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 삶의 방식,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전도된 삶을 극복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과제이다.  


최형묵(천안살림교회 목사ㆍ한신대 초빙교수 / 기독교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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