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시냇가에 심은 나무, 의인의 삶 - 시편 1:1~6[유튜브]

작성자
최형묵
작성일
2021-05-09 14:46
조회
12734
2021년 5월 9일(일) 오전 11:00 천안살림교회
제목: 시냇가에 심은 나무, 의인의 삶
본문: 시편 1:1~6



시편의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합니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이 말씀으로 집약되는 본문말씀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간결하고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바로 그 내용으로써 시편 전체의 표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먼저 복 있는 사람, 곧 의인의 길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점층적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악인의 길과 대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으로 정의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의인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악인의 꾀를 따른다는 것은 악인들이 모의하는 자리에 함께 하는 것, 곧 악인들의 권유에 이끌려 같이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직접적인 악행입니다. 의인은 그 악인들의 권유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의인은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습니다. 죄인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악인의 전례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직접적인 권유가 아니더라도 이미 이뤄진 악인들의 전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전통이나 인습, 또는 관습과 관행을 의미할 뿐 아니라 구조적으로 악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포함합니다. 권유를 따라 의식적으로 악행에 동참하지 않아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길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게 나도 모르게 빠져들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의인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않습니다. 이것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직접 악행에 가담하거나 아니면 모르는 사이 악의 환경에 빠지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입니다. 오만(휴브리스)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의식, 자기를 내세우고자 하는 욕망, 자기 밖의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기우상화입니다. 의인은 자기밖에 모르는 그 오만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본문말씀은 의인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의인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문제시된 율법주의의 맥락에서 ‘율법’으로 한정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조문으로서 율법이 아니라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을 일컫습니다. 그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삶으로 실현하는 것을 기쁨으로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달달 외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묻는 성찰적 행위를 뜻합니다. 사물의 이치를 따져 헤아리고 또 헤아리는 것을 뜻하며, 그 이치 가운데서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옳은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않는 것과 같이 하는 일마다 잘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건강하고 복된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우주적 생명의 이치를 깨달아 알고 살아가는 것은 자기의 자기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무가 나무가 되는 것은 그 생명의 존속을 위해 필요로 하는 마땅히 누릴 때 가능해집니다. 생명의 존속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을 누릴 수 있을 때 제 각기 생명으로서 제 몫을 한다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는 비유는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어서 본문말씀은 악인의 길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악인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고 그 귀결에 관해서만 말합니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의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정의하는 가운데 악인이 어떤 사람을 뜻하는지 밝혔기 때문입니다. 환기하면, 악인은 직접적으로 악행을 함으로써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사람, 악인들의 길에 빠져들어 악을 구조화하는 데 기여하는 사람, 더욱 근본적으로는 자기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 악인은 하나님의 뜻과는 역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습니다. 악인은, 곡식을 까불 때 알곡은 떨어지고 쭉정이는 흩날리는 것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에 밀착된 삶에서 나오는 비유로 그 진실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지만, 점점 자연과 괴리되어가는 삶을 사는 세대들에게 이 진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어쨌든 흩날리는 쭉정이에 비유되는 것은, 덧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악인은 심판 때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의인의 모임에 들어서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그대로 연상시킵니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렇게 간결하고 선명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시편의 표제로서만 그치지 않습니다. 모든 종교와 윤리의 근본적 가르침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무엇인 과연 참 인간의 길일까 하는 물음이 제기된 이후 주어진 통찰이요 깨달음입니다.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좋고 나쁨의 차원이요, 또 하나는 옳고 그름의 차원입니다. 아마도 오랜 동안 인간은 좋고 나쁨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이로우면 좋은 것이고, 해로우면 나쁜 것이라는 인식입니다. 주관적인 인식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며 살던 인간은 점차 자기만의 주관적 기준을 벗어나 성숙한 물음과 답을 구하게 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입니다. 그것은 주관적 차원을 벗어나 객관적 보편성을 지닌 물음이요 궁극적인 답을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자기만의 생존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존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 각성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각성이 부족적 종교와 보편적 종교, 기복종교와 윤리종교의 갈림길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좋음과 나쁨의 차원이 폐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옳음과 그름에 대한 판단의 기초와 더불어 여전히 선과 악의 판단은 중요한 윤리적 판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컨대 공동체의 덕을 말할 때 그것은 공동체에 좋고 나쁨을 뜻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을 때 상대적으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것은 끊임없는 진리에 대한 탐구를 뜻하고, 그것이 인간 삶을 바람직하게 만드는 진정한 윤리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진실을 환기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종교와 윤리의 대강령으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대하면서 이런저런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첫 번째로는 오늘 본문말씀을 보상의 논리에 따라 이해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결과론에 따라 말씀의 뜻을 이해하려는 시도입니다. 말하자면 의인은 모든 일이 잘 되고 악인은 망한다고 했으니, 모든 일이 잘 되는 사람은 의인이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사람은 악인이라고 단정한다면 그것은 말씀의 본뜻을 곡해합니다. 욥기에 보면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것이 이치이거늘 그렇지 못한 욥을 보고 악인으로 정죄하는 맥락에서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 또한 그렇게 오용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말씀은 부조리한 현상을 정당화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땅히 추구해야 할 옳고 그름의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당위의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따라야 할 가치기준입니다. 본문말씀이 통용되지 않는다면 통용되지 않은 현실을 문제 삼도록 우리를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마치 욥이 친구들의 보상의 논리에 저항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태도로 나아가도록 일깨우는 말씀입니다. ‘밤낮으로 주의 율법을 묵상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진정한 복, 진정한 삶을 누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편한 대로 생각 없이 악인의 권유에 빠지거나 악인의 전례를 따르지 말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뜻을 새김으로써 진정한 삶으로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본문말씀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의인의 삶과 악인의 삶은 그 결과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이 의로운지 불의한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주적 생명의 질서와 부합하는 삶을 누리고 있는지, 그래서 과연 자기가 자기로서 바로 서 있는지, 그것을 판가름하고 지금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본문말씀의 뜻은 부조리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오늘 삶의 현실이 본문말씀과 다르다면 거꾸로 그 부조리한 삶을 문제시하고 그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본문말씀을 대하면서, 그 말씀의 뜻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정말 오늘 삶의 현실에서 옳음과 그름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지 난감한 경우가 있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의 뜻을 깊이 숙고한다면 당연히 제기되어야 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우회적으로 한 사례를 들고 싶습니다. 밀턴 마이어의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라는 책은 현대 사회 한 가운데서 옳고 그름의 문제를 판단하는 것과 관련하여 깊은 통찰을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히틀러의 나치당원으로 활동한 10명을 인터뷰한 것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역사적 평가가 이뤄진 시점에서 나치의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는 자명하지만, 그것이 한 체제로 한 사회를 지배할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분별력을 잃을 수 있는지 이 책은 규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독일인들은 공산주의와 나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둘 다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평범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좀더 지나서는 나치가 과도한 행동을 할 때는 반대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처음엔 생각하지 않은 죄로 시작해 이웃에게 벌어지는 비극을 외면하던 그들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평범한 악인들’은 침묵하고 동조함으로써 나치의 공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바로 이 책이 소개하여 유명하게 된 마틴 니묄러 목사의 다음과 같은 시가 함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밀턴 마이어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단지 주민으로, 교사로, 일개 판사로 자리를 지켰을 뿐 다른 아무 생각도 하려 하지 않았던 ‘평범한 악인들’에 의해 놀라운 범죄가 저질러졌다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보면서 말했던 ‘악의 평범성’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과거의 한 사실로 머무르지 않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섬뜩하게 합니다. 독재국가의 국민들은 한편으로 보면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공동의 범죄자가 될 수 있고, 자본권력의 무자비성을 개탄하지만 동시에 그것을 떠받쳐주는 역할 또한 맡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일깨워줍니다.
그래서 역시 나치의 범죄에서 시작하여 죄의 문제를 깊이 있게 통찰한 카를 야스퍼스는 <죄의 문제 - 시민의 정치적 책임>에서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공범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정의와 인권을 실현하는 권력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진정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악인의 길이 아니라 의인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정도입니다. 교회는 옳고 그름이 흐려진 세상 한복판에서 분별력을 회복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많은 자원을 갖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본분을 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끊임없이 그 물음을 추구함으로써 스스로 변화되고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교회는 교회로서 본질적인 몫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옳고 그름이 혼미한 세상의 한복판에서 옳은 분별력을 지향하고(에토스) 그 분별력을 따라 모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파토스) 공동체로서, 새로운 삶의 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지난 주일 어린이주일에 이어 어버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대자연이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는 이때에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생명의 질서를 환기해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이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의 참뜻을 새기고, 그 말씀의 참뜻이 앞으로 이어질 세대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빛나게 해주는 역할이 아닐까요? 부모의 권위로 자녀를 훈육하고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로 말씀의 진실을 마음 가운데 받아들이게 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쁜 일일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진정으로 분별력이 있는 교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옳은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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